키케로가 보기에 사람들이 노년을 비참한 상태로 보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먼저 몸이 허약해지고 활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육체와 관련된 많은 쾌락이 사라지며 죽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인들은 자신들이 멸시당하고 무시당하고 조롱당한다고 생각하고 이에 따라 고집과 화도 많아진다. 하지만 플라톤이 지적했듯이 이는 나이 자체가 아니라 그릇된 성격에서 온다. --- p.62~63
이형준의 그림 [눈부신 날]은 현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빈곤층 노인의 자화상이다. 연세가 70세는 족히 되어 보이는 노인이 리어카를 끈다. 노인의 키보다 머리 한둘은 더 높아 보일 정도로 박스를 비롯한 각종 폐지가 가득하다. 최대한 쌓으려다 보니 옆으로도 여기저기 삐죽 튀어나와 있다. 하나라도 더 얹어서 폐지 수집업자에게 가져가야 단돈 백 원이라도 더 수중에 떨어질 테니 악착같이 주워 모았으리라. (…) 다중적인 의미를 담은 제목으로 느껴진다. 일단 현상적으로는 강렬하게 햇볕이 내리쬐는 날이라는 뜻일 게다. 다른 면에서는 아직 낮이 많이 남은 시간임에도 리어카 가득 폐지를 구해 업자에게 가는 길이니 수입은 괜찮으리라는 기대의 표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를 고려할 때 여기에서 눈부시다는 표현은 역설적 의미가 아닐까 싶다. 눈이 부실 정도로 햇볕이 쏟아지지만 현실과 앞날은 암울한 노인의 삶을 대비하는 의미 말이다. --- p.84~86
노년기 초입에 있는 사람도 자신의 80~90대를 경험한 것은 아니어서 여전히 막연함 속에 놓인다. 그만큼 노년이란 내내 불확실함 속에 있는 영역이다. (…) 결국 인간은 불안이라는 이름의 위험 경보기를 갖고 있는 셈이다. 특히 노년기의 불안은 센서가 아주 예민하게 만들어진 위험 경보기다.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을 때 이를 사전에 감지하고 경고음을 보낸다. 문제를 빨리 인식하고 해결에 나서라는 경고다. 만약 위험 경보기가 고장이 난다면 문제가 곪고 곪아 회복할 수 없는 심각한 사태로 터지고 나서야 알게 된다. 노인이라면 더욱더 회복 가능성이 대폭 줄어든다.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점검하고 자신의 대비 부족을 발견함으로써 우리의 시선을 문제 해결로 옮겨놓는다는 점에서 불안은 능동적 역할을 한다. --- p.127~128
고흐가 자살하던 날 적은 글만 봐도 그러하다.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고흐를 매장하고 난 후 테오는 형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자살하던 날 입고 있던 저고리 주머니에서 이 글이 적힌 종이를 찾는다. 도달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결핍이 커가는 정도 이상으로 그의 의욕이 자라나던 중임을 알 수 있다. (…) 자살을 선택하는 노인도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차라리 자포자기 심정으로 하루하루 날을 세는 데 만족한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이유도 없다. 일상의 반복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가면 어떻게 살아질 일이다. 무의미하지 않은 다른 삶을 꿈꾸기에 절망의 골이 더 깊어진다. 아직 가슴속에 새장의 문을 열어 날고 싶은 꿈이 있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살고 싶다. 잃고 싶은 게 아니라 얻고 싶다. 비우고 싶은 게 아니라 채우고 싶다. 하지만 노년의 세월이 깊어가면서 찾아오는 노화와 주변 조건의 악화는 희망과의 격차를 키운다. --- p.165~166
바보가 아닌 이상, 신이 아닌 이상 영원한 삶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유한하기에 결국 노년과 죽음이 기다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의 운명으로는 받아들여져도 ‘나’의 운명으로는 다가오지 않는다. 노년과 죽음에 가까워지는 ‘인간’은 있어도, 자신은 빠져 있다. --- p.186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는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작품 활동을 한 대표적 화가다. 그녀는 말년에 죽음을 소재로 수십 개에 이르는 작품을 내놓는다. 특히 [죽음에의 초대]처럼 자화상 형식을 빌려 죽음과 대화를 시도한다. (…) 결정적으로 죽음의 문제에 몰두하게 만든 것은 추상적 인간의 죽음이 아닌, 항상 같이 호흡하며 생명처럼 여기던 아들의 죽음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접한 그녀는 전쟁을 몰아내기 위한 적극적 활동을 한다. 70세를 앞둔 노년기가 되어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통찰을 포함하여 [죽음에의 초대]를 비롯한 죽음 연작을 내놓기 시작한다. --- p.200~201
에라스무스는 “등이 굽었으며 주름지고 대머리에 이가 빠져 합죽이가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삶을 즐기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사람들이 바로 내 고객”이라고 한다. 저승에서 막 튀어나온 것같이 주름으로 가득한 노인이라 하더라도 정열을 품고 인생의 아름다움을 믿는 노인에게 행복이 기다린다. 서로를 유혹하고, 끊임없이 단장하며, 비록 쪼그라들었더라도 몸을 자랑스러워하고, 욕망을 일깨우려 애쓰라고 한다. 정열을 품고 새로운 사랑을 꿈꾸는 노인에 대해 나잇값 못하는 수치스러운 짓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을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부끄러움이나 불명예, 수치, 모욕 같은 것은 그렇다고 느껴야만 아픔이지 않은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아픔이란 없는 것이다.” --- p.236~237
심지어 성적인 대화를 통한 상상력 자극만으로도 얼마든지 서로 쾌감을 증대하고 설렘을 유지할 수 있다. 성적인 대화와 상상력은 신체적인 제한이 없다는 점에서 노인에게 안성맞춤이다. 또한 노인의 경우 살아온 세월만큼 다양한 상상력의 소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적합하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노인의 성을 추하거나 부끄럽게 여기는 기존 사고방식에서의 탈피가 전제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욕을 에로스로 변경하는 것은 곧바로 에로스의 확장이고 성 에너지의 확장이다. 몸의 한 부분만을 사용하는 데 머물지 않고 온몸의 감각을 일깨우고 발달시키는 확장이다. 또한 짧은 시간의 욕구 충족에서 나아가 오랜 시간 쾌감을 유지하고 고양한다는 점에서 확장이다. 그리고 몸만이 아니라 상상력을 매개로 정신적 만족감까지 포괄한다는 점에서도 확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