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한테는 집도 없고 언젠가 이곳을 떠날 거라 생각하기에 다들 유목민족이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설사 가족이 있는 사람들도 핫산만큼은 다들 불행하잖아요. 도대체 가족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죠? 시간이 없다고 잘 돌봐주지도 않고 사랑해주지도 않는다면 말이에요.” --- p.256
“나이가 많은 노인들은 바로 그 나이와, 밤이면 빼서 물잔 속에 담가두는 틀니를 제하면 아이들하고 비슷하다. 그들은 우리처럼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마찬가지로 잘 먹지 못한다. 시몽도 얘기하기를, 나이란 고무줄과 같아서 아이들과 노인들이 그 양쪽 끄트머리를 붙잡고 잡아당기다 보면 결국 탁하고 어딘가 끊어지게 마련인데, 그때 고무줄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는 건 노인 쪽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인이 죽는다고 한다.”--- p.303
“저는 제가 홀아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아이들의 입양이 허락된다 해도, 안타깝지만 그 어떤 여인도 저 아이들을 돌보아주지 못할 거라는 점도 잘 압니다. 하지만 저는 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저 아이들에게 베풀 수 있는지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아들이 저 아이들을 너무도 좋아해서 이미 저한테는 자기 형제와 남매처럼 얘기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 모두 한식구가 된다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아무것도 베풀지 않는 다른 많은 가족들보다 훨씬 더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을 거라는 점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p.388
아이는 하늘을 죽이고 싶어했다.
툭하면 내뱉는 엄마의 신세타령 속에서 하늘은 언제나 밉상, 진상, 꼴불견 그 자체였다. 희망이 없었다. 파스칼을 공포에 떨게 한 그 유명한 무한공간의 절대침묵까지는 아닐지언정, 이 지긋지긋하고 답답한 생활을 나 몰라라 하는 저 하늘은 잔인하고 얄밉기만 한 적(敵)이 분명했다. 그 적을 제거해야 엄마도 편해지고 나도 살만 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결국 아이는 하늘을 쏘았다. 희망의 공을 쏜 것이 아니라, 절망의 총알을 쏘았다. 이제 겨우 아홉 살배기가 저지른 이 맹랑한 거사(擧事)는, 이후 아이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다. 비록 답답한 하늘에 구멍을 뚫지는 못했지만, 심지어 끔찍한 친족살해를 저지른 문제아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그 날의 그 총성은 희망이라곤 없었던 아이의 미래 위에 마법의 폭죽처럼 터져 생각지도 못했던 인연과 기회들을 불러모아준다. 그 모두가 아이에게는 전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글자 그대로 ‘지상의 양식’이다. 하늘을 죽이고 싶어했던 아이는 드디어 깨닫는다. 삶에 흠뻑 취하다 보면 하늘을 원망할 생각일랑 깨끗이 사라진다는 것을. 애당초 중요한 건 하늘이 아니라 땅이었다는 사실을…
--- 옮긴이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