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 연습이 싫어 진로를 바꿔 도서관학과에 입학했다. 이화여대 졸업 후 유학을 떠났고, 미국에서 대학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동안 강산이 두 번 바뀌었다. 우연히 책장에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쓴 영혼의 편지를 읽고, 반 고흐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행운을 얻었다. 반 고흐로 인해 생애 첫 소설을 쓰게 되었고, 지난 몇 년 그와 함께 앓던 시간은 팔레트의 노란색 물감처럼 따뜻하고 화사했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필명을 반고은으로 고집한 것은 반 고흐와의 우정을 활자로 오래 새기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새로 지은 이름처럼 새로운 장르의 글을 쓰고자 부단히 노력 중에 있다. 현재 시애틀의 워싱턴 대학교에서 한국학 사서로 일하며, [북:소리Booksori]라는 북토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출간한 책으로는 『책들의 행진』이 있고, 퇴근 후 저녁 시간은 주로 블로그(booksori.wordpress.com)를 통해 책 읽기와 글 쓰기로 보내고 있다. goeunban@gmail.com
우리는 한동안 멍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고흐가 맺어준 이상한 인연의 감상에 넋을 잃고 빠져 있었다. 이런 일은 지난 여름부터 시작된 고흐 바이러스를 앓고 있는 나에게 잊을만하면 다시 돋는 증상이었다. 작은 바이러스 하나가 침투해 들어오자 걷잡을 수 없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이렇게 시작된 고흐 바이러스가 고흐를 중심으로 우연 같은 인연들을 자꾸만 모이게 해 준다. 그것이 모여 계속 이어져 오고 있고, 그것이 바로 내가 아를로 떠나고자 하는 이유라고 후배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설명을 전했다. 고흐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인연의 보따리들이 앞으로 계속 더 펼쳐질지 정말로 상상을 초월한다고, 그래서 나는 이 뭔가에 홀린 이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이렇게 정처 없이 걷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이런 여행이 주는 묘미는 그 어떤 잘 짜인 여행보다도 묘한 여운과 감흥을 남겨 준다는 것을 전해주면서, 후배에게도 이런 여행을 권해보고 싶다고 전했다. --- p.159
열한 시가 다 되어서 우리는 론 강가로 함께 별을 보러 나왔다. 바람이 강가로 오자 더 세고 강하게 불었다. 가로등의 환한 불빛 때문에 별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양손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옆에서 새어 나오는 가로등 불빛을 감추고서야 흐릿하게 군데군데 별이 보인다. 별은 그렇게 크고 화려한 게 원래 아닌데 고흐가 그린 그 별빛 때문에 기대가 지나쳤나 보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강둑을 내려왔다. 오늘은 내가 친구를 그가 묵는 유스호스텔로 데려다줄 차례이다. 친구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친다. 어떻게 이 아를의 친구와 영화처럼 멋지게 헤어져야 할지 순간 막막했고 어색했다. 강바람에 떠밀려 그만 잘 가라고 여행 잘 하라고 그렇게 싱겁게 인사를 하 고 우리는 헤어졌다. 별빛이 반짝이는 론 강가에서 같이 사진을 한 장 찍으려고 했었는데 그것도 깜박했다. 운이 좋으면 내일 아를의 어느 골목에서 마주칠지도 모르겠지. 그러면 또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하고 고흐를 이야기하고 그러겠지 싶다. 그때는 사진을 꼭 같이 찍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