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스미는 밝은 교실에서 한참을 신나게 졸다가, 갑자기 눈을 뜰 때면 순간 내가 어디에 있는 건지 알지 못한다. 아까 가물가물하게 멀어져 갔던 선생님의 음성이 똑같은 음량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그 무음(無音)을 즐기고 있음을, 새삼스레 표시하고 있는 집단 같았다. 마른 나무 냄새,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빛. 창밖으로는 푸르른 나무숲. 여기에 있는 사람들, 같은 나이의 사이좋은 사람들. 쉬는 시간이 되면 일제히 요동하기 시작하는 공기. 필통에 반사된 빛이 천장에서 춤추고, 이제 10분 후면 울릴 종소리를 모두들 고대하고 있다. 이처럼 기적같은 공유를, 이곳을 떠나게 되면 두 번 다시 같은 친구들과 나눌 수 없다. 이 공간에는 그런 모든 정보가, 아스라한 향기처럼 포함되어 있다. 그런 느낌, 가슴을 저미는 빛의 기억.
--- p.75-76
마유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 가족 누구와도 전혀 닮지 않았었다. 어쩐 일인지 그녀만 유독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그렇다고 우리들이 딱히 절망적인 얼굴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나머지 세 사람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좋게 말하면 냉철하고 나쁘게 말하면 심술궂어 보이는 분위기가 그녀에게만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거의 천사인형 같았다. 그 외모 탓에 그녀는 보통사람들이 가는 길을 걸을 수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스카우트되어 아역 모델이 되었고, 텔레비전에 조연급으로 출연하게 되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영화배우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마유는 연예계를 가정으로 여기고 자라났고, 꽤 오래전부터 집을 떠나 있었다.
--- p.63
나의 새하얀 원피스, 밤바람과 바다 냄새, 비치 바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류이치로의 까맣게 탄 팔. 그리고 달, 파도에 흔들리는 달빛. 동생의 반바지. 싸고 달콤한 칵테일. 웅성거리는 사람들. 어슴푸레한 모래사장.
--- p.324
그렇게, ...늘 거기에 충만하게 있으면서도,쉽사리 만질 수 없는 찬란한 것이 있다. 나는 그것이 때로 나를 감싸고 있음을 느낀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때에서 지금으로 흐르는 물처럼 풍요롭게,마셔도 마르지 않는 달콤한 산소.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서 보석을 꺼낸다는 전설 속의 성자처럼,나는 내 몸속 어딘가에 그것들을 꺼내는 방법이 마련되어 있음을 늘 느낀다. 머리를 다쳐보는 것 또한 좋은 일이다. 그렇게 단언하자.
--- p.488
"왜 그러니, 사쿠미? 좀 이상하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어디가?"
나는 말하고, 어머니를 지켜보았다.
"얼굴에 힘이 하나도 없어. 어렸을 때 같구나."
"지금 막 일어난 참이라서 그런가."
그렇게 말하고서 나는 부엌으로 가, 추억의 홍수 같은 물건들 하나하나가, 잊고 있었음을 나무라듯 차례차례로 정보를 불러내는…… 그런 기분이 들 정도로 되살아나는 기억에 혼란을 느끼며 커피를 끓였다.
그런 데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머리를 다치고 난 후의 기억이 미묘하게, 마치 빵에다 버터를 얇게 바른 것처럼 향기롭고 자연스럽게 덧입혀져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너무도 명쾌하고, 너무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어제까지는 어림짐작으로, 직감만으로 <지금>만으로 가까스로 지내왔던 것에 비해, 나 자신이란 존재가 무겁고, 백과사전을 몇 권이나 껴안고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pp.339~340
"왜 그러니, 사쿠미? 좀 이상하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어디가?"
나는 말하고, 어머니를 지켜보았다.
"얼굴에 힘이 하나도 없어. 어렸을 때 같구나."
"지금 막 일어난 참이라서 그런가."
그렇게 말하고서 나는 부엌으로 가, 추억의 홍수 같은 물건들 하나하나가, 잊고 있었음을 나무라듯 차례차례로 정보를 불러내는…… 그런 기분이 들 정도로 되살아나는 기억에 혼란을 느끼며 커피를 끓였다.
그런 데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머리를 다치고 난 후의 기억이 미묘하게, 마치 빵에다 버터를 얇게 바른 것처럼 향기롭고 자연스럽게 덧입혀져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너무도 명쾌하고, 너무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어제까지는 어림짐작으로, 직감만으로 <지금>만으로 가까스로 지내왔던 것에 비해, 나 자신이란 존재가 무겁고, 백과사전을 몇 권이나 껴안고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pp.339~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