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률이 높았던 최근 드라마에서는 몇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우선은 언뜻 보아도 드라마의 형식에서 경계가 불분명하다. 미니시리즈인 듯하면서 시트콤의 규범을 따르고 있어 때로는 시트콤을 미니시리즈 형식으로 늘여놓은 듯한 느낌도 든다. 에피소드 중심의 코믹 설정은 기본이다. 다른 하나는 만화적 감성의 접근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쾌걸 춘향>은 만화적 감성으로 접근하며 시트콤의 규범을 따른 대표적인 예가 된다. 작가가 시트콤 보조작가 출신이라는 점도 우연하지는 않다. 성공한 드라마의 또 하나의 특징은 공론화되기 껄끄러웠던 주제나 소재를 시도한다는 점이다. 금기시 되던 소재나 주제를 다룬 일이 새삼스럽지는 않다. 1970년대는 정치적 금기에 도전하였다가 조기 종영된 사례들이 있었고, 1980년대 또한 소위 ‘정치 드라마’나 ‘경제 드라마’들이 정치·경제적 사건들을 ‘심각하게’ 다룬 점이 민감한 반응을 일으켜 중도하차하거나 조기 종영한 사례가 적지 않다. 최근의 시도는 심각하거나 무겁지도 않으며 주제가 거창하지도 않다. 심각하고 깊이 있는 주제조차도 유머와 재치, 순발력을 동원하여 심각함의 무게를 줄이며, 현실의 구차함과 간격을 확보한다. 그래서 드라마가 시트콤 작가들에게 눈을 돌리는 현상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우리 일VIII 한국 사회의 변화와 텔레비전 드라마
상의 한 부분을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차지해왔지만 애써 그 존재를 무시해온 것들, 청소년의 성, 성 역할 변화(남성 주부), 성 정체성 문제 등 사회적 소수자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1970~1980년대 현실사회극처럼 ‘심각하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최근 성공한 드라마들의 특징을 몇 가지로 나열했지만 이것이 반드시 옳다는 것은 아니며, 또한 이것뿐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은 그 드라마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보다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가 드라마의 성패를 결정하는 데 더 중요해졌다는 점이다.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의 반응이 시들할 때마다 소재문제가 언급되어 왔다. 더 이상 새로운 소재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드라마에 대해 항상 ‘새로운 소재’, ‘참신한 소재’를 요구하지만 텔레비전 드라마 40년의 역사를 지나온 지금 이미 신선한, 새로운 소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소재가 빈곤하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소재를 풀어가는 방식의 빈곤이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 텔레비전 드라마 ‘소재의 빈곤’을 외칠 때에는 사실 소재를 풀어가는 방법의 빈곤을 의미한다. 소재를 풀어가는 그 방법은 그 사회, 그 시대의 구성원들이 심원 속에서 광범위하게 공유하고 있어 소통과 교감을 위해 의존하고 있는 것, ‘정서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그 시대의 정서구조가 잘 녹아 있는 드라마가 매력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정서구조’라는 개념으로 드라마 40년을 살펴본 것이다. 레이몬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는 “문화는 일상적이다.”라고 말하면서 문화의 차원을 일상의 차원으로 끌어내렸다. “문화는 일상적이다.”라는 말은 인간이 일상의 실천과 경험에서 상례적으로 접하는 것들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룬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그러한 일상을 담아내는 일상적 문화의 용기이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따로 떨어진 공간에 독립적으로 흩어져 존재하는 시청자들 속에서 개별적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공유된 ‘정서’의 통로를 통해 집단적으로 체험된다. 따라서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한 사회적 체험은 특정한 시기의 지배적인 정서구조와 깊이 연결되며,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통해 그것을 확인하기도 한다. 텔레비전 드라마 40년의 역사를 지나는 즈음에 현실사회와 텔레비전 드라마 그리고 수용자가 만나는 접점으로서, 소통과 교감이 의존하는, 조정되고 조율된 보편적인 정서구조의 변화를 분석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한국사회의 변화 속에서 그와 조응하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역사적 변화를 살펴보고 그 기저를 관통하는 지배적인 정서구조를 재구성함으로써, 우리는 현실 사회와 텔레비전 드라마 인식의 간극을 좁혀갈 수 있을 것이다.
자료는 지난 40년 동안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드라마의 시놉시스와 방송시기 등이 수록된 각 방송사의 연감과 드라마 편람, 드라마를 분석한 학위논문, 방송 관련 저널에 실린 전문가 비평, 드라마 방영 후 잡지에 실린 드라마 평이나 신문기사 등의 2차 자료가 중심을 이루었다. 드라마의 시놉시스는 1960~1970년대, 심지어 1980년대 자료도 많이 남아있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경우는 2차 자료에 언급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해당 시기의 개별적인 텔레비전 드라마 자체를 분석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수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2차 자료를 의미있게 다루었다.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40여 년을 누군가 한번은 정리해주었으면 했었다. 방송프로그램에서 드라마가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드라마에 관한 논문이나 글이 많다. 그러나 40년의 역사를 한눈에 고찰할 만한 문헌이 부재하다는 것이 항상 아쉬움이었다. 방대한 자료와 긴 시간을 하나의 문헌으로 정리하다보면 의도하지 않은 누락이 있을 수 있다. 또한 현재적 관점에서 과거를 해석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한다. 그러나 반 백년이 가까워지는 현시점에서 자료 소실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정리해두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사실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드라마 관련 자료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어 있어 안타까웠다. 2차 자료에서 자주 언급되는 드라마들도 시놉시스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제작을 담당한 방송사 내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운 좋게 당시 제작자들의 개인 사료로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이 귀중한 자료를 취합하려는 노력의 부족으로 잘 활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이러한 자료의 취합까지는 노력하지 못하였다. 기회가 되면 이 작업도 시도하고 싶다.
급속한 사회 변화와 어제의 성공이 오늘을 보장하지 않은 시청자의 변덕 속에서 몇 년을 한 시기로 묶어 설명하고 특수하게 명명화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훗날 또 누군가는 하루하루가 달라 보이는, 그래서 변덕스러운 수용자 따라잡기에 여념 없는 지금의 현상 속에서도 일정시기 동안 공유된 지배적인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 미래의 몫이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관심 있게 지켜봐주신 김승현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커뮤니케이션북스’의 박영률 사장님과 작업을 담당하여 수고한 전정욱 팀장, 김재원 씨께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출간을 제의한 이영주 박사와 이장환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크다.
2005년 5월
정영희
--- 머리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