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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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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10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27쪽 | 252g | 128*188*20mm
ISBN13 9788932030494
ISBN10 8932030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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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쿵’ 소리가 들렸다. 이제 배롱나무에 매미 껍질 같은 건 더 없는데 말이다. 그건 두 개의 물체가 충돌하는 소리였고, 두 개의 세계가 서로를 겨누는 소리였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는 소리였다. 우리 차가 소장의 레인지로버를 들이받은 채 서 있었다. 미숙한 게 있다면 엄마의 운전 실력이 아니라, 이 위협으로부터 우리 가족을 감싸주던 어떤 보호막이었다. --- p.71~72

그러나 세상엔 우리보다 더 큰 거인이 있는 게 아닐까. 내가 개미를 내려다볼 때처럼 거인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우리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죽어라 달려봤자, 거인이 볼 땐 겨우 한 뼘 정도 이동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우리 마당이 그대로 실험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거인이 우리 마당에 비소로 오염된 토끼를 넣어놓고,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보는 게 아닐까. 창밖으로 보이는 동그란 달조차 의심스러운 밤이었다. --- p.79

우리 집 바로 앞 동에 루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둘째는 불쾌해했다. 이렇게 이사까지 하고 보니 아무래도 루가 우리 마당에 자루를 들고 왔던 그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둘째는 그게 불행의 시작이라고 믿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보다 훨씬 전에 이미 모든 건 시작되었고, 시작을 만든 우두머리들은 뒤에, 뒤에 숨어 있었다. --- p.90~91

아빠가 말했다. 나는 풍력발전기가 도시의 흔한 가로등처럼 멈춰 서서, 일몰 후 두 시간 동안 불을 켰다 끄는 걸 반복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내가 느끼는 차분함이란 모두가 바람에 시달리고 있으니 차라리 공평하다는, 그런 위안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였다. 모두가 이 태풍의 경로에 대해 말하는 동안 우리 가족만 앓고 있는 그 토끼냐 비소냐의 문제가 잠시 휴전을 선언한 것처럼 느껴졌다. --- p.152

말이 먼저 튀어 나가 상황을 견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말이 가장 늦는 경우도 있다. 말보다 앞서 걸어간 것이 더 많은 세계, 나와 뒤뒤가 산책한 건 그런 세계였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제 저렇게 말이 떨어지자, 막연히 짐작하고 있던 것들이 일순간 긴장한 듯 도열했다. --- p.184

우리는 이제 각자 마음에 구멍 하나를 뚫고, 저장고를 만들었다. 끌어 올리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을 그 안에 넣고 자물쇠를 걸었다. 물론 도로를 달리는 그 문장처럼, 모든 게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을 가능성은 늘 있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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