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통해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초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던 박노자. 그는 이 시대 대표적인 진보 논객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사실 한반도 고대사 전문연구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조선학과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첫 고대사 교양서인 이 책은 민족과 국가의 경계 너머 고대의 한반도가 지니고 있었던 다양성과 세계성에 주목한다. 정복과 확장 중심의 고대사가 지닌 함정을 벗어나 서로 교류하고 소통하는 새로운 고대사 페러다임을 제시한다.
박노자는 아쉽게도 한반도의 민족사학자들이 '위대한 고대 만들기'에 치중해 왔다는 사실을 집중 조명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고대사는 주변 지역과의 협조관계보다는 군사적인 관계에 유독 관심이 높았던 것도 사실이다. 역사 속의 전란을 민족적으로 해석하여 타 민족과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음에 늘 안도했다. 이러한 가치관이 21세기 국제화 시대에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의 고정불변한 상황이 아니며 현재에 대한 인식과 미래에 추구하는 바에 따라 질문 방식도 바뀌고 그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G20 정상회의를 앞둘 만큼 국제 교류가 활발해 지고 자신감을 갖게 된 시대에 한국의 고대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교류와 융합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그려보는 것으로, 내부의 다양성과 주변 지역과의 관련성 속에서 동태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고조선을 '만주를 지배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로 보려는 시각을 지적하며, 고구려의 '군사적 위대함'보다는 종족적, 문화적 다양성에 주목하고 중국, 일본과의 긴밀한 교류에 초점을 맞춰보자고 역설한다. 또 일본 열도와의 관계는 '왜침(倭侵)'이나 '백제 문화의 일본 전파' 차원에서만 바라보지 않고, 한반도와 문화 발전 속도가 그리 다르지 않은 중요한 교류 파트너로 바라본다. 그리고 화려한 불교 문화를 강조하는 기존의 교과서와는 다르게 고대 한반도인들의 생활 속에 무속이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지, 성기(性器)' 숭배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오랜 시간 동안 지녀왔던 기존의 사관이 갑자기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역사적 상상력의 반란이 우리 민족의 다양성과 소통의 역사를 투영해 보며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게 되고, 또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세계성과 다양성의 모습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