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선
(崔南善)
1890년(고종 27)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
문인·언론인·사학자·친일반민족행위자.
1890년 서울 출생.
본관은 동주(東州), 아명은 창흥(昌興), 자는 공육(公六).
호는 육당(六堂)·한샘·남악주인(南嶽主人)·곡교인(曲橋人)·육당학인(六堂學人)·축한생(逐閑生)·대몽(大夢)·백운향도(白雲香徒)이다.
아버지 최헌규(崔獻圭)와 어머니 진주(晉州) 강씨(姜氏)의 3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1902년 경성학당에서 수학, 1904년 일본 도쿄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후 중퇴하였다.
1906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역사지리과에 입학하고『대한유학생회보』의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1906년 신문관(新文館)을 설립. 1908년 11월 잡지 『소년(少年)』을 출판하였다.
1910년 3월 안창호(安昌浩)가 설립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근무, 10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설립하였다.
1912년 『붉은 저고리』, 1913년 『아이들 보기』, 1914년 『청춘』 등의 잡지를 발행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에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1921년 10월 출옥하였고, 1922년 주간지 『동명』을 발행하였고 1924년에는 『시대일보』를 창간하였다
1926년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과 『백팔번뇌(百八煩惱)』,『심춘순례(尋春巡禮)』, 1927년 『백두산근참기(白頭山勤參記)』, 1928년 『금강예찬(金剛禮讚)』을 발표하였다.
1935년부터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문화동원론(文化同源論)’을 주장, 4월 조선계회(朝鮮?會)의 고문을 맡았고, 1936년 「조선의 고유신앙[朝鮮の固有信仰]」을 발표하였다.
1936년 6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1937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3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조선 문화의 당면과제[朝鮮文化の當面課題]」를 게재하였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휴전 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고문을 맡으며, 언론을 통해 기고활동 지속하였다.
1957년 10월 10일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