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바르츠는 특유의 명강의로 유명했어요. 그의 강의는 듣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곤 했습니다. 전문적인 수학 연구에 관한 강의에서도 그랬지만, 가르침의 즐거움을 설파하며 교육자로서도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슈바르츠의 대중 강연에는 수많은 청중이 운집하여 귀를 기울였다고 합니다. 노년까지 지칠 줄 모르는 활동을 이어갔던 그는 프랑스적인 지적 전통이 배출한 깨어 있는 지식인으로 여전히 존경받고 있습니다.
“수학이 무슨 효용이 있냐고요? 수학 없이는 물리학을 할 수가 없어요. 물리학 덕분에 냉장고를 만들 수 있고요. 냉장고에는 바다가재를 보관할 수 있는데, 수학자는 그걸 먹고 수학을 더 잘할 수 있게 되지요. 그래서 물리학에 도움이 되고요. 덕분에 냉장고를 만들 수 있고, 그래서 바다가재….”
이 말은 여러 곳에서 인용된 그의 대중 강연 내용 중 일부입니다. 수학 때문에 과학이 발전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인류의 삶이 개선된다는 메시지를 유머러스하게 전달한 것인데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소통하던 슈바르츠의 재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_로랑 슈바르츠
거대한 꿈을 가졌던 천재 수학자 튜링은 안타깝게도 42세 생일을 목전에 남겨두고 이 세상을 떠났어요. 그는 먹다 만 사과와 함께 발견되었는데 사과에는 독약인 청산가리가 발라져 있었다고 합니다. 혹자는 미국의 컴퓨터 회사 애플사의 로고가 튜링의 먹다 만 사과를 의미한다고도 하지만, 확인된 바는 없어요. 동성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그가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한 혼돈과 세상의 핍박을 감당하지 못해서 자살한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지요. 공식적으로는 자살로 발표되었지만, 음모론에 기반을 둔 다른 설도 있습니다. 튜링에게 화학적 거세라는 치욕을 주어 결국 그의 자살을 야기한 영국 정부는 2009년에 이것이 잘못된 결정임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한 바 있지요.
컴퓨터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인간의 삶의 방식을 바꾸면서 튜링의 업적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고 또한 합당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튜링 어워드’라는 상이 제정된 것도 하나의 예인데요. 이는 전산 과학의 노벨상으로 불립니다. 또한 그의 이름이 붙은 도서관이나 길도 많이 생겨났어요. 그가 더 오래 살면서 대담한 꿈을 펼쳤더라면 인공지능의 문제에 큰 진전을 이루었을 거라는 추측도 있는데요. 그랬더라면 20세기 문명의 지도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_앨런 튜링
뇌터의 재능이 늦게 발현된 것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교육과 연구에서 배제되던 당시 독일 사회체제의 모순에 기인한 바가 큽니다. 1860년대에서 1880년대를 거치면서 프랑스 ? 영국 ? 이탈리아 순으로 여성의 대학 입학이 가능해졌지만 독일 대학들은 1900년까지도 여성 불가의 원칙을 고수했거든요. 그나마 에미 뇌터는 아버지인 막스 뇌터가 에를랑겐 대학의 수학 교수였던 덕에 수학을 일찍 접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대학 입학만큼은 불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우선은 에를랑겐 대학과 괴팅겐 대학의 청강생 신분에 만족해야 했어요.
그러던 중 여성의 대학 입학이 허용되자 뇌터는 1904년 에를랑겐 대학에 정식으로 재입학합니다. 그리고 폴 고든의 지도하에 불변 이론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7년간 대학에서 강의를 하지요. 이 기간 중 이루어진 연구가 힐베르트와 클라인의 주목을 받게 되고, 1915년에 뇌터는 그들의 초청으로 괴팅겐 대학에서 연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독일의 시스템에서는 여교수의 정식 임용이 불가능했기에 뇌터는 하는 수없이 무급으로 강의와 연구를 병행했는데요. 가족의 재정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탓에 그녀는 늘 절약하며 생활했고, 그 습관이 평생 이어졌다고 합니다. 당시 그녀의 강사 임명을
주장했던 힐베르트는 지금도 회자되는 유명한 발언을 남겼는데요. 바로 “성별 차이로 강사 임용을 결정하다니. 이곳은 대학이지 목욕탕이 아니지 않소?”라는 따끔한 일침이었지요._에미 뇌터
물리학으로 시작해서 위대한 수학자의 반열에 오른 고다이라 구니히코[小平邦彦, 1915~1997]는 1954년에 필즈상을 수상하면서 아시아인 최초로 필즈상을 받은 수학자가 되었습니다. 히로나카는 그로부터 16년 후인 1970년에 아시아 출신으로는 두 번째로 필즈상을 수상합니다. 히로나카가 필즈상을 수상한 주 업적은 ‘특이점의 해소’에 관한 것이었는데요. 그의 자서전 격인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책에 쓴 내용을 보면 “모순과 문제로 가득한 세상도 그 너머에 있는 이상향의 투영”이라고 하는 다소 형이상학적인 우주관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흡사한 것 같기도 하고요. ‘특이점’이란 게 무엇일까요? 수학책에 왜 ‘형이상학’이라는 말이 나오는 걸까요? 자, 우선 머릿속으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그려보세요. 여러분이 붓으로 큰 종이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손을 떼지 않고, 한 번 지난 곳을 다시 지나지도 않고, 또 급하게 방향을 바꾸지도 않으면서 쓰는 겁니다. 부드러운 그림은 나올 수 있겠지만 의미를 담은 글씨를 쓰기는 힘들겠지요? 붓으로 글씨를 쓰려면 붓이 떨어지는 순간이 있고 겹치는 지점도 생기게 마련이니까요. 이처럼, 즉 붓글씨를 쓸 때 붓이 두 번 지난 곳이나 급하게 방향을 바꾸느라 꺾인 곳과 같은 지점을 ‘특이점(singularity)’이라고 합니다. 특이점은 부드러움이 깨지고 문제(trouble)를 만드는 점인데요. 그 덕분에 흥미로운 모양이 생기고 의미의 전달이 가능해지기도 합니다._히로나카 헤이스케
천싱선은 청나라 시대에 태어나 만 한 살 때 공화국으로 바뀐 중국에서 자라며 교육을 받았어요. 칭화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중국에서 수여된 역사상 최초의 석사학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 독일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수학자로서의 삶을 대부분 미국에서 보냈지요. 시카고 대학과 버클리 대학에서 30여 년간 근무하고 은퇴한 뒤에는 중국에 돌아와 중국 수학을 현대화하는 데 여생을 바쳤습니다. 어릴 적 친구인 노벨물리학상 수상(1957)자인 양전닝[楊振寧, 1922~]과 함께 말이지요. 고국인 중국에 돌아와 후학을 기르며 과학 연구의 씨앗을 뿌린 선각자로서 천싱선은 지금도 여전히 중국인들의 지극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80년대 그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화가 있는데요. 당시 천싱선은 모교인 난까이에 수학 연구소를 설립하고 있었는데 중국의 모든 아이들이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가 어디를 가든 TV 카메라가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했다고 합니다. 마치 유명한 아이돌스타를 대하는 것처럼요.
수학자들 사이에서는 흔히 ‘천(Chern)’이라고 하면 곧바로 천싱선으로 통합니다. 그의 성인 진(陳)은 중국에서는 흔한 성으로 ‘Chen’으로 쓰는 게 보통인데요. 그가 1934년 독일로 유학가면서 이런 방식으로 표기한 모양이에요. 언젠가 들은 우스개 중에 얼핏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중국의 陳씨 성을 가진 어떤 대학원생이 있었대요. 이 학생이 유학을 가기 위해 여권을 신청하면서 자기 이름의 영문 표기를 ‘Chern’으로 했다는 거예요. 그러자 이를 전해들은 지도 교수가 그를 불러 몹시 야단치면서 당장 ‘Chen’으로 바꾸라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영문도 모른 채 주눅이 잔뜩 들어 연구실을 나서는 학생의 뒤통수에 교수가 뭐라고 중얼거렸는지 아세요? “이 세상에 ‘Chern’이라는 성을 쓸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뿐이야. 감히 주제를 모르고!”였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중국인들이 얼마나 천싱선을 존경하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요?_천싱선
군론의 역사에 중요 기여자로 등장하는 한국인 수학자도 있다. 현대수학의 중요 영역과 성취를 소개하고 주요 기여자를 적은 책인 듀도네의 『현대수학의 파노라마』라는 책에서 한국인은 ‘Group Theory’ 분야의 이림학 교수가 유일하다. 20세기를 풍미한 최고 수학자의 대열에 끼어 있다고 단언할 수 있고, 최근 광복 70주년을 기념하여 정부가 선정한 과학기술 7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유한체 상에서의 Lie 군의 특정 유형이라고 볼 수 있는 Ree 군 이론을 창안했다.
이림학 교수는 캐나다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정치적 신념 때문에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오랜 망명생활 끝에 1985년 서울대를 방문해서 특강을 했는데 당시 강의실 칠판에 큼직하게 ‘Langlands program’이라고 쓰고는 필기 없이 거의 말로만 강의한 게 이채로웠다. 본인이 학부 지도교수를 맡았던 랑그랭즈라는 학생이 프린스턴 교수가 되어 불세출의 수학자가 된 것에 대한 기쁨을 피력하면서 국내 학생들도 자잘한 수학만 하지 말고, 이런 중심 문제, 난해한 문제들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강연 내용은 지금의 학생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청년 이림학이 미군정 시절에 남대문 시장에서 우연히 구한 수학잡지에 실린 수학자 막스 초른(Max Zorn)의 논문을 읽고 그가 제기한 문제를 풀었다는 것은 지금도 한국 수학계의 전설로 회자된다. 당시 그는 투고 절차도 몰랐고 그런 생각도 안 했기 때문에, 초른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기가 그의 문제를 풀었다고 알렸다. 학문적 윤리의식이 분명했던 초른이 이걸 정리해서 이림학이라는 저자명으로 저널에 투고해서 한국인 최초로 국제저널에 게재된 수학 논문이 탄생한 것이다._더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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