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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고도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 예담 | 2009년 07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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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7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420쪽 | 538g | 148*210*30mm
ISBN13 9788959133918
ISBN10 8959133914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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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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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누구나 자신의 내부에 그런 방을 가지고 있어요. 아름답고, 아름다울 수 있고... 해서 진심으로 사랑 받고... 설사 어떤 비극이 닥친다 해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라고 중얼거릴 수 있는... 그런 방, 말이에요. 아무리 들어갈 수 없는 방이라 해도 결국엔 문득 그 방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전 그게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도 찾아올 리 없지만, 그래도 그 방문에 몸을 기대면... 기대어 울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거죠. 방문을 활짝 연 채 세상을 살아가는 여자도 있을 거예요. 언제든 손이 닿는 곳에, 혹은 현관과 마루 정도를 지나면 곧 방문을 열 수 있는 여자도 있을 테고... 하지만 길고 깜깜한 동굴을 지나,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야 겨우 자신의 방 앞에 다다를 수 있는 여자도 있는 거예요. 설사 열리지 않는 문이라 해도, 또 누구에게 그곳에 와주세요, 같이 가지 않을래요 라고 차마 말할 수 없는 방이라 해도 말이죠. 손에 든 촛불이 꺼져간다 해도, 결국 꺼지기 전에 다시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더라도 말이죠. 그 길이 너무 멀어... 그리고 점점 발걸음이 뜸해지는 여자도 있는 거예요. 그리고 결국 자신에게 그런 방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여자가 있는 거예요. 줄곧 나 자신이 그런 여자라고 생각해 왔어요. --- p.208

사랑은 상상력이야. 사랑이 당대의 현실이라고 생각해? 천만의 말씀이지. 누군가를 위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그게 현실이라면 이곳은 천국이야. 개나 소나 수첩에 적어다니는 고린도 전서를 봐.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그 짧은 문장에는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 있어. 애당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어, 대신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었지. --- p.228

11월이었다. 그리고 나는 스무 살이었다.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사랑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그 무렵 내가 포기했던 많은 것들, 그리고 끝끝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단 하나의 사랑에 관한 것이다. 길고 긴 인생의 터널을 생각하면 더없이 짧은 시기였지만 그 순간의 빛을 기억하면서, 나는 기나 긴 터널의 어둠을 지나왔다는 생각이다. 나는 그 무엇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 무엇도 믿지 않았다. 따라 뛰는 사람들, 피리소리를 따라 어디론가 달려가던 사람들과...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세상의 풍경들을 그저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었다. 아름다워지는 여자들... 아름다워 「져야만」 하는 여자들과... 학력을, 차를, 또 집을... 말하자면 힘을 「가져야만」 하는 남자들... 서로에 의해, 서로에 비해, 올라선 서로를 위해 구축하던 프리미엄과... 올라서지 못한 서로에게 요구되던 또 그만큼의 스펙에 대해... 그러나 전혀 달라지지 않는 삶의 성질에 대해... 오로지 스펙과... 프리미엄만 늘어날 뿐인 이 삶에 대해... 하여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30년만 지나면 허물어야 할 한 채의 집을 위해, 실은 조건과 조건... 이윤과 프리미엄에 의해 만난 서로에 의해... 하여, 실은 있지도 않았던 사랑에 내내 절망할 이 삶에 대해... 그 「생활」에 대해... 하여 자신의 자녀밖에는 사랑할 수 없는 이 삶에 대해... 다시 사랑이란 명목으로 가두고 사육하는 이 삶에 대해... 갖추고 올라섰다 한들, 이를테면 일병 7호봉 정도나 될 그 대단한 프리미엄에 대해... 실은 허망한, 하여 과시밖에는 할 게 없는 이 삶에 대해... 그러나 결국 죽음을 맞이할 이 삶에 대해... 고생하셨어요, 말은 하지만 실은 유산을 셈하고 있을 자녀들에 대해... 그래서 실은 그 무엇도 남지 않을 이 삶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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