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컴컴한 세상을 나의 생체험으로 번역하는 일의 아름다움
한국사회에서 청소년의 삶은 무척 기이한 성장과정의 극점에 놓인다. 이 성장과정은 한결같이 부모의 지극한 관심과 보호로 둘둘 말려 있는데, 그러나 얄궂게도, 지나친 행복과 까닭모를 불행의 극단을 오고가게 된다.
처음에 이 관심은 과도한 애정으로 시작한다. 한국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를 마치 왕자처럼 키운다. 아이를 천재로 착각하기 일쑤고 우리 아이만은 특별히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온갖 명품을 아이에게 쥐어주며, 최상의 유치원을 향해 호사한 의상을 입혀 아이를 모시고 간다. 아이를 태운 부모의 승용차들은 천차만별이다.
그러다가 아이의 실제적인 능력이 은근히 부모의 무의식 속에서 스며든 상태에서 아이가 건너야 할 험난한 경쟁의 다리와 마주쳤을 때, 저 바닥 모를 사랑은 도저한 억압으로 변한다. 부모는 아이의 머리에 세상의 모든 지식을 우겨넣을, 스승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찾아, 사방을 탐문하고 정보를 캐내며 아이를 그렇게 패인 학업의 묘혈 속으로 집어 넣는다.
가장 이상적인 교육은 옛사람이 말했듯, 자득(自得), 즉 스스로 익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오늘의 한국교육의 궁극적인 문제점이 획일화된 답의 소모적 사용이라고 말했거니와, 이러한 교육 방향은 학생들에게 스스로 세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대답을 찾을 수 있는 열린 사고의 가능성을 차단해 버린다. 교육의 진정한 목표가 지ㆍ덕ㆍ체의 능력을 구비한 성숙한 개인을 기르는 것이고, 그 성숙한 개인의 다른 말이 ‘자유로운 주체’라고 한다면, 그 속성상 교육 과정 자체도, 미숙한 존재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키워나가는 기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스스로 자유를 익힌 존재만이 자유의 뜻을 알고 자유를 바르게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내용은 어린 청소년들이 세상과 기운차게 씨름하고 화해한 일들의 기록이며, 이 책의 형식은 언어와 기운차게 씨름하고 화해한 과정의 기운을 가득 담고 있다. 그 내용과 형식이 모두 세상이라는 괴이한 어둠 속에서 세상과 자신을 동시에 밝힐 전구에 전선을 잇고 점등을 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물론 삶을 행위한 청소년들에 비해서, 그걸 언어화한 청소년들의 태도는 좀 더 순응적이다. 우리는 청소년들이 연습한 외국어가 오늘의 학교제도에서 가장 유용한 과목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현행의 교육제도의 억압성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보는 일이 동시에 그 제도의 메카니즘에 잘 적응하기 위한 연습이 되기도 하는 아이러니가 여기에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나는 한국의 교육제도의 전면성에 대해서 말했었다. 교육의 문제는 누구의 잘못이랄 것도 없이 우리의 풍속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현실의 압도적인 압력 앞에서, 이마나한 시도는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매우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제도의 명령을 나의 일과로 치환해 버리는 것, 그것도 꽤 해볼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여기에는 학생 자신의 생생한 주체적 경험, 세상과 정면에서 대결하는 존재가 되는 짜릿한 경험이 있는 것이다.
모쪼록 이 학생들이 스스로 치른 이 신나는 모험을 그들의 유용한 재산으로 모셔둘 게 아니라, 정신의 양분으로 소화하길 바란다. 그럴 때 그들의 언어의 모험은 다시 삶의 모험으로 확대되어 나갈 것이며, 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가 변신의 기이한 몸살을 앓게 되는 걸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정과리 (문학평론가,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