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
웬 아가씨가 비명을 지르며 기도원에서 도망쳐 나오고 있었다.
청바지에 보랏빛 블라우스 차림의 그녀는 한국 아가씨가 아니고 외국 아가씨 같았다. 어깨까지 함함하게 흘러내린 긴 생머리가 짙은 갈색이었고 먼발치서 봐도 검붉은 빛깔의 벽돌색 피부가 그랬다. 키가 크고 날씬한 체형의 그녀는 그러나 서구 여성이 아니고 동양계 아가씨 같았다. 필리핀이나 태국 아가씨 같기도 했고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의 뱅골인 같기도 했다.
그녀는 한국말을 아주 잘했다. 분명히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라는 비명을 한국말로 정확히 내질렀던 것이다. 계절은 2000년 8월 중순의 한여름이었다.
아가씨가 또 한 번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사람 살려요! 살려 주세요!”
기도원 정문에서 도망쳐 나온 아가씨는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처럼 정신없이 숨을 곳을 찾다가 그녀를 발견하고 놀라 급브레이크를 밟는 지헌제의 은회색 승용차를 발견하곤 무조건 그쪽으로 뛰었다.
그러다가 헌제의 차도 경계의 대상이 되는지 갑자기 몸을 홱 돌려 부근 공터 쪽으로 다시 비조처럼 뛰기 시작했다.
그 공터는 기도원의 임시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여기저기 겅성드뭇한 수풀이 울타리 구실을 하고 있었는데 두서너 대의 승합차와 승용차들이 따가운 햇살 아래 정물처럼 주차돼 있었다.
아가씨가 그쪽으로 허둥대며 뛰다가 그제야 자신의 차가 있다는 것을 번쩍 깨달았는지 빨간색 프라이드 승용차로 총알같이 뛰어들었다. 이어 발동을 걸기가 무섭게 헌제의 차 옆을 지나 산 아래로 전속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경사진 산길을 얼마나 빨리 달아나는지 부연 흙먼지 속에서 차가 금방이라도 전복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차는 어느새 수풀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러나 아가씨의 뒤를 추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가운 폭염이 백열등같이 하얗게 내리쬐는 기도원 정문엔 얼씬거리는 개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 제1부 깊은 산속에 숨어 사는 천하일색
헌제는 이상해하며 다시 차를 스타트시켰다.
곧바로 기도원의 정문으로 향했다.
마치 시골의 초등학교를 연상케 하는 끝이 뾰족뾰족한 기도원의 철제 정문은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처럼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었다. 그 한쪽으로 <차량 통제구역>이라는 붉은 글씨의 팻말이 땅바닥에 말뚝처럼 붙박여 있었다. 그래서 아까 도망친 아가씨도 별수 없이 차를 기도원 밖 정문의 좌측에 있는 그 공터에다 주차시켰던 모양이었다.
날카로운 뿔은 있으나 말 잘 듣는 우직한 소처럼 헌제도 별수 없이 차를 공터의 한쪽에다 주차시킨 다음 기도원의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걸음을 뚝 멈추었다.
아까는 건성으로 보았던 길쭉한 목재간판이 번쩍 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누런 니스 칠이 된 간판은 오래돼서 칠이 희치희치했는데 검은색으로 <칼포스기도원>이라고 종으로 쓰여 있었다.
그 간판의 상단에 무슨 마크같이 가로로 쓰인 작고 이상한 외국어가 보였다. 언뜻 보기엔 영어 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영어가 아니었다. 영어에서는 한 번도 못 본 καρπ?라고 되어 있었다.
“제기랄! 도대체 저건 어느 나라 글자야? 천당 글잔가?”
이마에서 주르르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손수건 대신 버릇처럼 손등으로 씩 훔치며 헌제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아무튼 옳게 찾아온 것 같군. 그 새끼가 분명히 <칼포스기도원>이라고 했것다?”
하고, 이번엔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숲 속의 은밀한 궁전 같은 하얀 건물의 기도원을 제외하곤 사방은 온통 울창한 나무와 수풀로 뒤덮여 있었다. 구릉들은 들쭉날쭉 기복이 심했고 이름 모를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여느 산과 같이 여기서도 음악 소리 같았다. 매미들이 우는 소리는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계룡산의 산중턱까지 차를 몰고 올라온 듯싶었다. 내려다보니 그가 올라온 실지렁이 같은 비포장도로가 저 아래서 기도원의 정문까지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이 마치 오솔길 모양으로 꼬불탕하게 기도원 쪽으로 이어졌다간 여줄가리 길이 또 하나 생겨서 기도원 옆을 휘돌아 기도원 뒤쪽의 후미진 수림 지대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저쪽으로 가면 또 어디가 나올까?
아무튼 왕복 차량이 겨우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산길치고는 꽤 폭이 너른 그 길은 기도원에서 많은 돈을 들여 닦아놓은 길인 듯싶었다.
헌제는 계룡산에 와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계룡산이 어떤 산이란 것쯤은 대충은 알고 있었다. 특히 ≪정감록≫과 결부된 민간신앙 때문에 조선왕조 이래로 괴상한 소문이 많았던 곳, 무엇보다 계룡산 남쪽에 있는 신도안이란 마을은 40여 종이 넘는 각종 유사종교의 온상으로 유명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기도원도 겉으로만 성스러운 기도원인 척하지 속으로는 혹시 신도안의 유사종교에서 뿌리를 내린 그런 사이비 종교집단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야 왜 아까 그 이국적으로 생긴 아가씨가 기도원에서 도망쳐 나오며 사람 살리라는 비명을 질렀겠는가.
--- 제1부 깊은 산속에 숨어 사는 천하일색
서울에서 자가용 승용차를 몰고 헌제가 계룡산까지 온 목적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김판철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그 친구는 군 복무 시절에 알게 된 친구였다. 헌제와 같은 27세인 그는 보통 키의 헌제보다 키가 살짝 크고 체격이 우람하며 대단한 미남이었는데 육군 제3군단 사령부에서 같이 복무를 했었다. 그는 G2(정보처)에서 복무하고 헌제는 G3(작전처)에서 복무했는데 내무반이 같았기 때문에 자연히 친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 후 하루는 우연히 서울역 부근에서 그를 만났다.
그날 둘은 부근의 호프집에서 생맥주를 마셨다.
무슨 말끝에 술에 취한 헌제가 자신의 태몽이 <용꿈>이라는 말을 자랑처럼 늘어놓자 김판철이 흥미 있게 듣고 있더니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야, 지 병장! 태몽대로라면 너 한대가리 해먹겠구나. 그럼 말야, 내가 누굴 하나 소개해 줄 테니까 그 사람 한번 만나볼래?”
제대 후에도 그들은 군대 시절의 고참 때같이 병장이라는 호칭을 잊을 수 없는 추억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소개해 주다니, 누군데?”
“암튼 한대가리 해먹으려면 무조건 그분을 만나봐. 그분 빽으로 큰돈도 벌고 출세도 할 수 있을 테니까.”
“글쎄 그 사람이 누구냐니까? 청와대나 무슨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냐?”
“그건 직접 만나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그분이 계신 곳은 계룡산이야. 계룡산까지 찾아갈 수 있겠어?”
“계룡산?”
이건 불과 일주일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 제1부 깊은 산속에 숨어 사는 천하일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