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한 곳에서 또 하나의 무서운 사건이 터졌다.
하찮은 꽃구슬 한 개로 둘째아들의 용꿈 태몽을 큰아들한테 팔아버린 태몽의 그 업보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인지 서울로 이사해선 좀 뜨막하다 싶던 불행이 다시 또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계룡산의 어느 동굴 속에 갇혀 개죽음의 위기에까지 몰린 헌제도 헌제지만 이번엔 하나뿐인 고명딸 제희에게 뜻하지 않은 불행이 닥치고 있었다. 그 불행은 여자에게 있어 최대의 불행이라고 할 수 있는 성폭행에 관한 것이었다.
휘영청 밝은 달이 요요히 떠 있는 어느 날 밤이었다.
그러니까 헌제가 그 동굴에서 죽음의 위기를 겪고 있는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직 1월 초순인데도 이날 밤따라 날씨가 유난히도 푸근해서 제희는 남자 친구 최석호와 밤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시간은 밤 8시경이었다.
그들은 가끔 그렇게 만나 때론 영화 구경도 하고 찻집에서 차를 마시기도 하며 밤이면 아무 곳이나 겁 없이 거닐곤 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아직 깊은 사이는 아니었다.
교제한 지가 이제 겨우 3∼4개월 정도밖에 안 되기도 하지만, 제희가 신학대학에 다니는 독실한 신학생이기 때문에 철저한 방어의식이 강해서 아직 키스도 한 번 아니한 그런 순결한 사이였다.
걸으면서 겨우 손목을 잡거나 팔짱을 끼는 게 고작이었다.
나이도 동갑내기였다.
그리고 만나게 된 동기도 지극히 평범한 일상적인 인연에서 만나게 됐었다. 시내버스에서 좌석에 앉아 있던 제희가 옆에 서 있던 최석호의 가방을 들어준 것이 인연이 되어 물 본 기러기와 꽃 본 나비처럼 둘은 금방 친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 제4부 우범지대에서 생긴 무서운 일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둘의 사이가 종교적으론 극과 극(?)의 사이라는 점이었다.
제희는 기독교이고 석호는 불교였다.
석호는 현재 D대학 인도철학과 2학년이었다. 그는 외모가 아주 인상적인 특이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인도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깜부기숯 같은 검은 수염이 귀밑에서부터 턱까지 구레나룻으로 나 있는 괴물 같은 놈이었다.
그 수염을 그는 절대로 면도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슨 신앙처럼 그 수염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얼굴은 그 수염으로 인해 언뜻 어딘가 좀 근엄하고 엄숙한 수도사처럼 보일 때가 많았는데, 그 괴짜적인 개성과 남성적인 매력 때문에 제희는 그만 첫인상에서부터 그에게 매료돼버렸던 것이다.
여자처럼 유난히 흰 살빛, 그녀보다 약간 작은 키, 그리고 우량아처럼 살이 쪄서 옆으로 딱 바라진 그 땅딸막한 체구가 좀 낙제점수이긴 하지만.
종교가 달라서인지 둘은 만나면 대화부터가 대립적이었다.
서로가 자기가 공부하고 있는 종교가 더 <진리>라는 주장들을 폈다. 제희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석호는 불교의 절대성을 때론 싸움하듯 큰 소리로 악악거리며 주장할 때가 많았다.
말하자면 그런 주장들을 고집하면서 안으로는 서로를 은근히 개종시키려는 저의들을 품고 있었다. 그래야만 사랑이 무르익어 장차 결혼을 하더라도 종교가 같으므로 종교 문제로 인한 갈등 없이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들을 서로가 오월동주처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밤도 그랬다.
둘은 제희의 집이 있는 천호동 부근의 찻집에서 만나 석호가 산 저녁 식사를 한 후 암사동 유적지 광장을 좀 거닐다가 부근의 어느 야산으로 걸어 오르며 또 대립적인 종교 싸움으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대낮같이 밝은 달빛에 제희의 청색 재킷과 청바지가 한껏 더 푸르러 보였고 넥타이까지 맨 석호의 회색 양복은 영락없는 달빛 바로 그거였다.
그 야산은 별로 높지 않은 산이었다.
하지만 워낙 수풀이 울창해서 우범지대로 소문이 나 있는 무시무시한 산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이제까지 한 번도 그 야산으로 올라 데이트를 한 적이 없었었다.
그러나 이날 밤은 누구의 발이 먼저 그 야산으로 향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묵시적으로 약속이 돼 있었던 것처럼 서로가 스스럼없이 약간 가풀막진 그 야산으로 걸어 오르고 있었다. 대화들에 열을 올리다 보니 자신들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 제4부 우범지대에서 생긴 무서운 일
그들은 겁 없이 어느새 꼬불꼬불한 오솔길 같은 산길을 지나 상당히 깊은 곳까지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잔디밭에 나란히 앉았다. 그곳은 비록 잔디밭이긴 하나 여기저기 시커먼 수풀이 에워싼 좀 음침한 숲 속이었다.
“참, 태몽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태몽이라니? 임신부가 잉태했을 때 꾸는 꿈 말입니까?”
“태몽이 그것 말고 또 있나요?”
“왜 갑자기 태몽 말이 튀어나오지?”
“언젠가 한번 제가 얘기했던 것 같은데요. 큰오빠를 잉태하셨을 때 우리 엄마가 아주 기막힌 태몽을 꾸셨다고 말예요.”
“아, 용꿈인가 뭔가 하는 그 태몽 말이군.”
대꾸 대신 제희는 두려운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부엉이 우는 소리가 어쩌다 한 번씩 음산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부엉이뿐만 아니라 다른 밤새들도 간간이 그렇게 울었다.
“왜 또 그 얘기를 꺼내는 겁니까?”
석호도 부엉이 우는 소리가 기분 나쁜지 사방을 둘러보며 물었다.
“꿈을 미신으로 생각하느냐, 그걸 묻는 거예요.”
용꿈인 그 태몽을 믿고 큰아들이 장차 틀림없이 위대한 사람이 될 거라고 하늘같이 믿고 있는 어머니가 문득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희는 저도 모르게 또 그 말을 꺼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어머니뿐만 아니라 전화기로 동생의 머리통을 살인하듯 때려놓고 도망친 후 집에 코빼기도 비치지 아니하는 무지막지하고 비정한 큰오빠도 문득 떠올라서 그랬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아 있으면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그걸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같은 피를 타고 태어난 여동생으로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큰아들이 보고 싶고 걱정이 되어서 어머니는 요즘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터였다.
“나는 꿈을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놈입니다.”
“과학적이라뇨?”
“꿈이란 사람이 잠을 자는 동안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각, 즉 생시에 품었던 가지가지의 사념들이 하나의 환상 같은 영상으로 재현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뭐 이건 나의 아집적인 지론이긴 합니다만. 그래서…….”
“그래서요?”
“태몽을 믿는다는 것, 그것은 곧 미신이다 이거올시다.”
“어째서요?”
“제희 씨의 큰오빠 경우처럼 어머니가 태몽으로 용꿈을 꾸었다 해서 그 아들이 장차 틀림없이 위대한 인물이 될 거라는 근거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거야말로 얼마나 어리석고 웃기는 일이냐 이겁니다.”
“뭐가 그렇게 어리석고 웃겨요?”
“꿈에 용을 봤다 해서 잉태된 그 아이가 장차 왜 위대한 인물이 되어야 합니까? 꿈에 나타난 용이 인간을 출세시켜 주는 동물입니까? 용은 상상의 동물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새빨간 거짓부렁의 상상의 동물이란 말입니다. 돼지꿈하고는 그 개념이 다르죠. 돼지는 세상에 실재하는 동물이니까요. 그러나 돼지꿈도 엉터리란 것을 나는 알았습니다. 돼지꿈을 꾸면 횡재한다고 해서 언젠가 한번 나도 돼지꿈을 꾸고는 20억짜리 복권을 열 장이나 샀습니다. 그런데 돼지꿈도 새빨간 거짓부렁이지 뭡니까. 열 장 중에서 오백 원짜리도 한 장 당첨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도 태몽이 용꿈이라고 해서 그 아들이 장차 위대한 사람이 꼭 될 거라고 믿고 있단 말입니까? 하하하, 순진한 양반들이로군.”
석호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밝은 달빛에 흰 이를 반짝거리며 한바탕 실소를 터뜨리더니,
--- 제4부 우범지대에서 생긴 무서운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