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새벽 눈을 뜨자마자 찾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담배 또 하나는 커피.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웠던 시절이 절반,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셨던 시절이 절반. 그렇게 흘러갔다고, 감히 인생을 요약해버리는 여자의 속삭임이다. --- p.11
뻬쩨르부르그 사람들은 특별히 주장한다. 사상보다도 예술보다도 돈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지고한 액체, 그것이 바로 커피라고. --- p.14
머물러 썩어 가느니 붙잡혀 치도곤을 당하더라고, 불행을 거스르고 나랏법을 거슬러 오르고 싶었다. 천하를 뒤덮는 조롱이 등장한다고 해도 나는 그 조롱 너머로 날갯짓하리라. --- p.23
커피를 추출하는 다양한 기구들을 비싼 값에 공들여 사 모으고 또 그것들을 비교하며 커피를 끓이다 보면 하루가 훌쩍 갔다. 원두를 담은 천주머니를 포트에 넣고 끓는 물을 부어 커피를 내리는 비긴 포트, 프랑스인 뒤 벨로이가 발명한 몸체가 둘로 나눠진 드립식 커피포트도 멋지지만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은 해양학자 제임스 나피어가 만든 사이폰이었다. 이 기구는 몸체 사이를 진공으로 만들고 깔때기 필터를 꽂았다. 알코올램프로 가열된 물이 상승하여 커피가루에 닿게 한 후 식히는 방식을 취했다. 내가 가진 사이폰은 모두 열두 개로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다. 나는 특히 유리 공 둘을 붙인 사이폰을 좋아했다. 물이 올라갔다 내려오는 과정을 생생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훗날 어떻게 커피 끓이는 법을 배웠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열두 개의 사이폰이 진열된 침실 창가를 떠올렸다. 창밖에는 눈보라가 흩날렸고 길게 늘어선 사이폰들에서는 투명한 물들이 맛있게 오르내렸다. 아, 정말 흐르는 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맛이 떠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