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10여년 만에 고향집을 찾듯 수도원을 찾은 자매가 있었다. 좌절과 시련으로 5년여 동안 자포자기 상태로 지내다가 하느님을 찾은 자매였다.
“신부님, 안아 주세요.”
면담성사 후, 벽면의 시를 읽어 가던 중 주르르 흘리는 눈물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솟아난 말이었다.
몇 살이나 되었을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산책 때마다 꼭 안아보는
아름드리 푸른 솔…
다시 몇 년 전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계속된 입사시험의 실패로 냉대와 좌절 속에 지내던 한 청년이 피신처를 찾듯이 수도원을 찾아와 면담성사 후 쏟아 낸 말이다.
“신부님, 한 번 안아 주실 수 없어요?”
이게 사람이다. 사랑을 목말라하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꽃 없는 초목이 없듯이 사랑 없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명예에, 지식에, 권력에, 재물을 얻었다 해도 사랑에 실패했다면 그 인생 무조건 실패다. 사랑 빠진 그 성취들은 공허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결국 사랑이다. 사랑은 우리의 모든 것이다. 사랑이 있을 때 충만한 인생이지만 사랑이 빠지면 허무한 인생이다. 사랑이 있을 때 빛나는 인생이지만 사랑이 사라지면 어두운 인생이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실행해야 하는 동사다
사랑은 구체적이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닌 실행해야 하는 동사다. 우리 온 몸은 사랑하라고 있는 ‘사랑의 도구’다. 멀리 밖에서가 아니라 가까이 몸담고 있는 지금 여기서 함께 있는 가족과 이웃들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의 학교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느님이 보내 주신 선물인 가족과 이웃들이다. 거창한 사랑이 아니라 작은 행동으로의 사랑이다. 진정이 담긴 사랑의 실천이 감동을 주어 마음을 치유하고, 정화하고, 충만하게 한다.
알고 보면 악惡도 치유 받아야 할 사랑의 결핍이다. 빛 앞에 사라지는 어둠처럼 사랑의 빛 앞에 사라지는 악의 어둠이다. 악을 무장 해제시키는 길은 사랑밖에 없다. 더디더라도 이게 확실한 길이다. 힘든 것 같지만 가장 쉬운 것이 사랑이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게 죄
삶은 전쟁이다. 어느 자매가 자기 남편을 전우라고 한 말이 지금도 머리에 생생하다. 전우끼리 단결해야지, 싸워 분열되면 내외의 적을 감당할 수 없다.
남한테는 지더라도 자기한테는 이겨야 서로간의 평화다. ‘내 탓’, ‘네 덕’의 겸손일 때 평화와 일치이지만 ‘내 덕’, ‘네 탓’의 교만일 때 불화와 분열이다. 밖에서 볼 때 아무리 문제없어 보여도 안에서부터 무너지면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 이래서 믿음의 끈, 사랑의 끈, 희망의 끈, 꼭 붙잡고 살아야 자기와의 영적전쟁에 승리한다.
어느 분이 수도원을 방문하여 노 수사님께 물었다.
“수도원에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즉시 노 수사님의 답변이었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일어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보다 더 좋은 대답은 없다. 바로 이게 십자가의 길이다. 잘못으로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다.
하느님 사전에는 절망이란 단어가 없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이다. 그러니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시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 바로 이게 우리 평생의 삶이다.
♣애기똥풀꽃밭 검정고무신
5월이면 신록의 생명으로 빛나는 수도원 배밭 주변에는 샛노란 애기똥풀꽃이 한창이다. 마치 신록의 하늘에 무수히 떠오른 샛노란 별들 같다. 애기똥풀꽃을 볼 때마다 자작 애송시 ‘검정고무신’이 생각난다.
볼 품 없는 검정고무신
애기똥풀꽃밭에 다녀오더니
꽃신이 되었다
하늘이 되었다
샛노란 꽃 잎 수놓은 꽃신이 되었다
샛노란 꽃 잎 별 떠오른 하늘이 되었다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어디나 하느님 계신 하늘나라다. 비록 검정고무신처럼 볼품없이 가난한 우리 수도자지만 하느님 은총으로 고양되어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 참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고귀한 품위의 꽃신이 되어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마음의 옷을 벗어라
참사람은 부단히 옷을 벗어가는 사람이다. 성서 속의 세리와 창녀는 종교와 율법, 윤리라는 층층의 옷을 입은 답답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옷을 벗어버린 확 트인 사람을 상징한다. 오늘날 노출 현상을 자기표현이라 하지만 정작 벗어야 할 옷은 마음의 옷이다.
벌거벗겨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겹겹의 옷을 벗을 것을, 개방할 것을 호소하고 계신다.
배우면 배울수록, 알면 알수록 복잡해지는 것은 잘못된 공부다. 배울수록, 알수록 단순해져 하느님과 사람 앞에 투명하게 드러나야 잘된 공부다.
아직 사람이 되지 못했기에 옷을 입을 수밖에 없지만 언젠가는 벗으려고 입는 옷이며, 마침내는 종교라는 옷까지도 다 벗어 버리고 하느님 앞에 평범한 인간으로 서야 할 것이다.
♣가난한 겨울나무가 아름답다
수도원 정문 옆 개가죽나무의 이파리 다 떨어진 가지들 사이로 푸른 하늘이 환히 보이고 새벽에는 초롱초롱한 별들이 쏟아질 듯하다. 마치 욕망과 환상, 감상의 나뭇잎들 다 떨어버리고 하느님 향해 가난하게 서있는 영혼을 생각하게 한다.
반대로 왼편 배밭에 은행나무가 두 그루 있다. 바야흐로 단풍이 들기 시작한 은행잎들이 빽빽이 달려있어 하늘을 가리고 있다. 빽빽한 나뭇잎들이 푸른 하늘을 가리고, 밤하늘의 별들을 가리고 있다.
욕망과 환상, 감상의 나뭇잎들이 내 영혼을 가려버리면 ‘에고ego’에 완전히 가려져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에고’라는 나뭇잎들을 다 떨어버리고 하느님 앞에 가난하게 서있는 겨울나무 같은 모습이라야 하느님을 볼 수 있다. ‘참나’를 발견할 수 있다.
♣있어야할 자리에 있을 때 행복하다
참행복은 ‘존재’ 자체로부터 온다. 쌓는 행복, 덧붙이는 행복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샘으로부터 솟아나는 행복이다.
문득 수도원 정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길 가 늙은 오동나무가 생각난다. 그 나무는 ‘있음’ 자체만으로 여유와 평화를 준다. 실용적 잣대로 재면 배나무 한 그루보다 못하지만 ‘있음’ 자체만으로 행복하고 크나큰 기쁨을 주는 오동나무다.
어느 수녀님이 말씀하셨다.
“이 오동나무가 없었다면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할까요?”
있어야할 자리에 있을 때 사람은 행복하다. 그것이 ‘있음’ 자체에서 솟아나는 행복이요, 이웃에 전파하는 행복이다. 모든 사물은 제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이것은 ‘모든 사물은 제 자리에 놓여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 아름다움과 행복은 일치하니까. 무엇이든 ‘제 자리’에 놓여있을 때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다. 제 자리에 뿌리 내릴 때 가장 푸르른 나무가 된다. 늘 푸른 나무의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겸손한 사람이 향기롭다
그렇다. 모든 덕 중의 으뜸인 어머니의 덕은 ‘겸손의 덕’이라 한다. 누구나 선망하는 겸손의 덕은 무엇이며, 과연 누가 겸손한 사람이겠는가?
겸손한 사람은 흙 같은 사람이다. 흙에서 나왔다 흙으로 돌아갈 육신임을 아는 사람이다. 온갖 초목들의 생명을 키워내지만 이들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는 게 흙이다. 사람homo이나 겸손humilitas이라는 라틴어 어원이 흙humus에서 기원한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흙같이 겸손해서 참사람이란 결론도 나오게 되는 것이다.
말없이 모든 것을 수용해서 온갖 생명을 키워내는, 넉넉하고 푸근한 흙 같은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자 지혜로운 사람이다.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다. 겸손과 함께 가는 지혜다.
♣김수환 추기경과 반말 하는 수사님
성 베네딕도수도회 왜관 본원의 첫 종신서원자인 김삼도 마인라도 수사님은 김수환 추기경님과 대구의 신학교에서 1년 동안 함께 공부하셨는데, 언젠가 추기경님이 우리 요셉수도원을 방문하셨을 때, 마침 배추밭에서 일하고 계시던 마인라도 수사님과 나누신 대화를 잊지 못한다.
“니가 나보다 두 살 많지 않나?”
추기경님의 반말 투 소박한 말씀에 수사님은 전혀 위축됨이 없이 자연스럽게 대답하셨다.
“음, 맞다. 내가 니보다 두 살 많다.”
그때 김수환 추기경님께 반말을 한 사람은 아마 수사님 한 분 뿐일 것이라고 말씀드리며 웃었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내 방 바로 옆이 수사님의 방이었는데, 잠을 자다가 수사님의 잠꼬대에 깨어 들어보니 ‘주의 기도’를 노래로 하고 계시지 않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로 시작되는 기도로 잠꼬대를 할 정도로 신심이 깊으셨다.
또한 참 낙천적이라 생활 자체가 바로 유머였다. 가을 어느 날 수도원의 단풍잎 붉게 물든 나무 아래서 한 자매님과 나누시던 대화도 잊지 못한다.
“나 지난밤에 시끄러워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수사님의 말에 자매님이 사유를 묻자 그 대답이 걸작이었다.
“밤새 천사들이 사다리에 올라가 나뭇잎에 색칠하며 움직이는 소리가 얼마나 시끄럽던지, 그 속에서 어찌 잠을 잘 수 있겠나?”
♣‘천국에 같이 가자’던 독일인 신부수사님
남도광 호노라도 신부님은 독일의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수도원 출신으로 1940년 함경남도 원산의 덕원수도원에 선교사로 파견되셨다가 수도원이 공산당에 접수, 해산되자 동료 독일인 선교수도자들 59명과 함께 체포되어 5년 동안 압록강변의 산간오지에 있는 ‘옥사덕’이란 악명 높은 수용소에서 고생하셨다. 그 후 일행 중에 17명이 병사하고, 천신만고 끝에 살아나셨다.
내가 수도원에 입회하여 6년 동안 함께 살았는데 여름방학 때 두 주 동안 병원에 입원하신 신부님을 간병한 일이 있다. 그때 병문안 온 수사님 두 분이 장난기가 발동해 신부님께 물었다.
“신부님, 천국에 가면 참 좋다고 합니다. 천국에 빨리 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수사님을 바라보시던 신부님이 대답하셨다.
“니나 가라.”
말 그대로 촌철살인, 참으로 통쾌한 말씀에 폭소와 더불어 분위기가 환하게 밝아졌다. 순간 죽음이 상대적으로 작게 생각되며 삶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짐을 느꼈다.
그러자 신부님에 뒤질세라 다른 수사님이 다시 짓궂게 물었다.
“신부님, 정말 천국에 가고 싶지 않습니까? 성인들은 늘 천국을 그리며 사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신부님의 즉각적인 대답이었다.
“같이 가자.”
♣하느님의 영원한 연인,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님
언젠가 이해인 수녀님이 동료 수녀들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진정이 가득 담긴 말로 “종교학과 동문으로 학교 다닐 때는 ‘범생이’였고 지금은 성인신부”라고 치켜세울 때 나는 겉으로는 겸손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심 기쁘고 얼마나 고맙던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 않던가.
작년 10월 4일, 내 영명축일 때 수녀님으로부터 받은 소박한 편지가 너무 고마워 잊지 못한다.
가장 짧은 말로
가장 깊은 기도를
바치게 하소서
친애하는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장 아름다운 계절……
영명일을 축하드립니다.
늘 나무처럼 사시는 수사님의 모습에서 감동을 받습니다.
건강하세요, 언제나.
-클라우디아 수녀 드림
‘늘 나무처럼 사시는 수사님의 모습’이란 표현에서, 나무 같은 믿음으로, 믿음의 나무 되어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새로이 하게 되었다. 성장하는 나무이듯 성장하는 믿음의 나무다. 저절로 믿음이 아니라 가꾸고 돌봐야 하는 믿음이요, 공부해야 하는 믿음이요, 배워야 하는 믿음의 유산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