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작은 신라 금귀고리들을 모아 놓고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고대 광실 넓은 대청 위에 풍경소리 들으며 앳된 여인의 핑크빛 두 볼 위에 간들거렸을 아기자기한 귀고리들의 지체가 아물아물 보이는 듯싶다. 굵은 고리로 된것을 태환식 가는고리로 된 것을 세환식이라고부르며 이 고리에 금사슬을 늘이고 금 화롱구를 달았으며 그 아래 하트형 장식이나 나무열매 또는 버들잎모양의 금장식을 달았고 때로는 화롱구에 하늘색.초록색.같은 유리구슬을 박아서 그 아롱진 아름다움이 먼 신라 귀족 사회의 꿈을 속삭여 주는 듯도 싶다.
--- 본문 중에서
신윤복의 풍속도에 있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도회적인 세련이나 김홍도의 풍속도에서 볼 수 있는 구수하고도 익살맞은 서민사회의 일하는 풍정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이 김득신의 풍속도에서는 기지아 해학의 즐거움이 생동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물론 김득신의 작품이 모두 그렇다는 말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본 이 풍소도첩의 내용들을 보면 언뜻 김홍도의 아류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김홍도의 작품에서 은은히 흐르는 인간들의 품위나 은근한 시정에 비하면 김득신의 작품에서는 풍김이 또 다른 익살과 재치가 엿보인다고 하고 싶다.
이른 봄날의 안낮 툇마루에서 자리를 치던 노경의 한 부부 앞에서, 아껴 키우는 병아리를 도둑고양이가 물고 뛰는 스릴 있는 장면이 너무나도 실감나게 표현된 이 그림을, 나는 그의 풍속도 작품 중에서도 가장 좋아한다. 다급한 어미닭은 필사적으로 새끼를 구하려고 덤벼들고, 뒤를 돌아보는 고양이를 쫓아 영감은 긴 장죽을 치키들고 사뭇 툇마루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닫는 절박한 풍경이 너무나 한국적이며 너무나 서민적인 익살과 정서를 보여 주는 까닭이다.
--- pp.378-380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 p.78
물고기 몸체에 용머리가 달린 어족이 참말로 세상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고려시대의 청자기 중에는 그러한 형상으로 만든 어룡형 주전자가 있고 또 청자 상감무늬 중에도 그러한 모양의 어족이 가끔 나타난다. 이 매병에 나타난 물고기의 형상을 바라보면 아치 굼실거리는 잉어 몸체에 너털웃음치는 용의 머리를 달아 놓은 것 같아서 턱없이 다정한 느낌을 지니게 되는 것이 즐겁다.
--- p.242
말하자면 이 항아리에 그린 용 그림의 작자는 현실 속에서 이렇게 신기스러운 용꿈을 꾸면서 익살스러운 용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을지도 모른다. 조선시대의 도공들은 마음이 마치 이 못생긴 용처럼 순박했고, 그들은 대개 그리고 싶은 것을 자기 나름대로 거리낌없이 그릴 수 있는 천진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 p.279
나는 가끔 이 연경당이 내 것었으면 하는 공상을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곧잘 나의 평생소원은 연경당 같은 집을 짓고 그 속에 담겨보는 것이라는 농담을 해 본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 숨김없는 나의 현실적인 소망이면서도 또한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허전한 꿈이기도 하다. 세상에 진정 잊을 수 없는 연인이 두번 다시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아마 세상에는 정말 못 잊을 집도 다시 있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 p.24
그리 험하지도 연약하지도 않은 산과 산들이, 그다지 메마르지도 기름지지도 못한 들을 가슴에 안고 그리 슬플 것도 복될 것도 없는 덤덤한 살림살이를 이어가는 하늘이 맑은 고장,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이 강산에서 먼 조상 때부터 내내 조국의 흙이 되어 가면서 순박하게 살아 왔다.
--- p.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