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빅토르 위고가 쓴 튈르리 정원의 카트린 드메디시스, 오텔드빌의 앙리 2세, 앵발리드의 루이 14세, 팡테옹의 루이 16세, 그리고 방돔 광장의 나폴레옹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다스리지 않는 자, 즉 시인과 몽상가 들의 파리도 있고, 우리는 헨리 밀러의 파리를 달렸다. 아직 그를 읽지 않았던 때지만, 타이를 매지 않은 낡은 코듀로이 정장 차림으로 취하고 발광하며 모두를 증오하는 마음으로 걸어 집에 돌아오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그 모든 걸 포용하는 그를 볼까 기대했다.
--- p.24
파리에서는 때때로, 지방 마을에서는 그보다 더 자주 위안의 소리, 확신의 소리, 종루와 첨탑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소리는 정오에 하루를 가르고 자정에 어둠을, 그사이 시간을 가른다. 모두가 유한하지도 육체적이지도 않다는 안정됨이며 경고다. 믿음의 시대가 있었으니, 비록 하얗게 샜지만 그 뼈는 단단해 여전히 유럽이라는 말뭉치의 일부다. 마을에서 자주 종소리가 들리고, 그것이 사소하고 세속적인 것들을 자제시키는 힘을 느낄 수 있다.
--- p.34
누군가 파리에 살며 남서부 언덕바지 마을에 오래된 집을 소유한 스웨덴 여인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툴루즈와 보르도 사이에 있고 피레네 산맥에 가깝지는 않은 동네였다. 알고 보니 ‘s’를 선호에 따라 발음하기도 안 하기도 한다는 제르(Gers) 지방의 일원이었다. 이중모음을 조금만 잘못 발음해도 전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짓는 프랑스인들로서는 드물게 무신경한 예다.
--- p.77
헤밍웨이는 이름으로 옷을 엮었다. 산시로, 앙기앵, 세인트클라우드의 경마장. 밀라노, 산세바스티안, 키웨스트 같은 도시들. 늦가을 궂은 날씨가 닥치면 그는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파리를 떠나, 비가 눈으로 바뀌어 소나무에 내리고 추위 속에서 밤길을 걸어 집에 돌아갈 때면 발밑이 뽀드득거리는 지역으로 옮긴다고 했다. 그는 겨울엔 스위스에 가까운 오스트리아 포어알베르크의 슈룬스에서 지냈다. 거기에 대해서는 물론 질브레타, 키츠뷔엘, 엥가딘에서 타는 스키에 대해 썼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도 슈룬스에서 썼다. 그 덕분에 스키가 좋아졌지만 내가 직접 타게 되리라고는 꿈꾸지 않았다.
--- p.153~154
다운클라이밍은 훨씬 어려운 일이다. 내 숨소리가 들리고 내 떨림을 자각하게 된다. 절대적으로 혼자다. 도와줄 사람도 없다. 여기 아닌 다른 곳에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감수하려 들 것이다.
육상 선수는 탈락하고 비칠거릴 수 있다. 야구 타자는 헛스윙을 할 수 있고, 테니스 선수는 전력 쏟기를 포기할 수 있다. 가장 높은 수준의 권투 선수조차 포기를 할 수 있다. 등반의 핵심은 때로 탈출구가 없다는 점이다. 포기가 불가능하다. 로베르토 두란이 등반가였다면 추락사했을 것이다. 과장된 위험보다 이 점이 등반에 더 힘을 실어준다. 등반은 원시적이어서, 멍청하고 마초에 이기적일 수 있는 등반가들도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는데, 자신의 영혼, 말하자면 자신의 품성에 관해서 알게 된다는 것.
--- p.186~187
늦은 오후 우리는 포르타니그라로 걸어갔다. 거리는 병원이 많았고 드문드문 은행도 보였다. 나무가 거리 한가운데 심어져 있었고 곧 그 위로 진한 갈색 석재의 로마 대문이 나타났다. 독일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로마 기념물로 높이는 거의 10미터였고 3층 반짜리 커다란 결혼 케이크 같았다. 하지만 건너편의 유명한 호텔은 사라졌다─1967년에 헐렸다고 누군가 나중에 말해줬다. 그 자리에 상자 모양의 새롭고 실용적인 체인 호텔이 들어섰다.
그것이 포르타니그라의 뒤편에 나 있는 새로운 트리어의 첫인상이었다. 고대 시장과 그 너머로 요란한 가게가 빼곡히 줄지어 선 보행 상가. 인파로 붐볐으며 칙칙하고 낡은 것과 천박한 것이 안타깝게 섞여 트리어의 중심은 이제 큰 쇼핑몰 같아 보였다. 958년에 제 개성과 십자가를 얻은 중앙광장 한구석엔 심지어 친숙한 노란색과 빨간색의 맥도날드도 있었다. “예전엔 이렇지 않았다오.” 나는 말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바뀌었소.”
--- p.226~227
이 모두의 상속자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뻗어 있는 숲, 그 아래 불규칙한 마을, 조용한 지붕. 귀족층은 운전─그들은 일면 좋은 옷을 입고 재규어에 앉아 푸르스름한 앞 유리창을 통해 우아한 얼굴로 힐끗거린다─을 하지만 요즘은 누구나 차를 몬다. 진짜 호사는 그 모두와 동떨어진 것으로, 가로지를 순 있지만 가질 순 없는 땅 위에, 바람 소리만 남은 고요함 속에, 저무는 태양을 제외한 영구함 속에 있다.
--- p.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