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비에서 내놓은 '리-라이팅' 시리즈는 눈에 띄는 기획물이다. 고전을 다시 쓴다는 것, 매력적인 발상 아닌가. 기존의 고전 읽기는 허구헌 날 본문에 해설만 덜렁 붙인, 싱겁고 따분한 것들이었다. 현재적 맥락이 없는 고전은 종이쪼가리로 전락하기 쉽다. 한데 이 시리즈는 책을 깊이 있게 연구한(혹은 재미있게 읽은) 가이드를 내세워, 그의 삶과 경험을 통하여 원전을 바라보도록 만든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 속에서 텍스트를 읽고, 해체·분석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디자인하여 간직한다. 이렇게되면 고전 읽기가 철저하게 현재적인 작업이 될 수 있다. 물론 맹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이드의 역량(특히 깊이와 표현력)에 따라 고전 읽기의 편폭이 엄청나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 과정에서 텍스트의 전체적인 면을 놓치고 부분 밖에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는 것. 그러나 모든 시도는 어차피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골방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보다는 설령 부족한 것이 있더라도 새롭게 읽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나로선 시리즈 1번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 가장 끌렸다. 박지원은 국문학 사상 전무후무한 문장가이며, 그의 『열하일기』는 청나라 황제의 70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사신의 신분으로 북경을 다녀온 기행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사상가, 문장가, 예술가,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다층적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난 걸작으로 평가된다(이 시리즈가 『논어』도 아니고 『국가론』도 아닌, 『열하일기』로 문을 열고 있는 것은 의미 있다). 거두절미하고, 고미숙의 책은 어떤가? 나는 개인적으로 아주 유쾌하게 읽었으며, 그야말로 기획에 걸맞은 책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고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다시 쓴다'고 할 때, 다시 씌어진 책은 하나의 작품이지 않으면 안 된다. 원전의 의미를 설명만 해주는 구태의연한 해설서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자체로 유쾌한 개성을 가진, 펄펄 살아있는 '고미숙표 열하일기'다.
이 책이 그만한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열하일기』에 대한 고미숙의 매니아적 사랑이 책에 곧바로 전이된 것, 그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몇 번의 운명적 계기를 거쳐 『열하일기』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드러낸 프롤로그를 읽어보면, 그녀는 매우 솔직하고 순수하며 열정적인 사람인 것 같다. 요컨대 그녀는 박지원과 『열하일기』에 정신없이 빠져들었으며, 또 사정없이 자신을 던졌던 것이다. 결과는? 열렬한 애정과 흠모가 밴 <공감의 비평서>가 탄생한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텍스트에 대한 감정이입과 독자를 감동시키는 힘이 바로 여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책의 생동감은 그녀의 독특한 문체 때문이기도 하다. 지배 담론에 도전하는 개성적인 문체를 구사하는 데 관심이 있는 그녀는, 근엄하고 딱딱한 말투를 버리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고 강하게 드러내는 방식을 택한다. 그녀는 '곁가지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기', '눈치보지 않고 자기 식으로 말하기'를 모토로 삼은 듯하다. 생동하는 구어와 과감한 영탄, 생략, 많은 느낌표와 따옴표를 곧잘 동반하며, 명사형 어미로 문장을 끝내는 걸 즐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국땅의 한 점포에서 벽에 쓰여진 <호질>을 촛불아래 '열나게' 베껴쓰자 주인이 묻는다. 그걸 대체 무엇에 쓰려느냐구. 조선에 돌아가 친구들에게 보여줘 한바탕 배꼽잡고 웃게 만들려 한다는게 연암의 답변이었다. <호질>보다 연암의 행동이 더 배꼽잡을 일 아닌가?(p.6)
그러나 늦바람이 무섭다고, 늦깎이로 읽기 시작한 『공산당 선언』, 『독일 이데올로기』, 『프랑스 혁명사 3부작』에 나는 한 마디로 '번개 맞을 것'같은 충격을 받았다. '변증법'과 '유물론'을 통해 그때까지 희뿌옇게 시야를 가리고 있던 삶과 사유의 추상성이 한방에 날아가버렸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맑스의 수사학은 '환희' 그 자체였다. 그렇게 '프로페셔널'하고 전투적인 내용을 그토록 선정적(?)이고 생기발랄한 말로 구성할 수 있다니! 석사논문을 쓴 이후 내 영혼을 장악하고 있었던 글쓰기에 대한 통념이 전면적으로 수정되는 순간이었다. 두번째 클리나멘. (p.19)
그런데 아뿔사! 멋진 이별론을 펼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거기에 몰두하느라 연암은 엉뚱한 길로 들어서버렸다. (....) 이 대목도 갈 데 없는 한 편의 '시트콤'이다. 생각해보라. 이별은 생이별이 가장 슬프다느니, 그것도 강에서 이별을 해야 제격이라느니, 「배따라기」가 어떻고, 소현세자가 어떻고 하면서 비장한 테마뮤직이 흐르다가 느닷없이 길을 잘못 들어 죄충우돌하며 따라잡는 꼴이라니.(pp. 167 - 168)
만일 이러한 매니아적 사랑과 발랄한 문장의 실체가 속 빈 강정이라면 참 대책 없는 우환일 것이다. 그러나 고미숙은 『열하일기』에 대한 충실한 가이드이면서도 결코 박지원의 것으로 치환될 수 없는 자신만의 '『열하일기』새로 쓰기'에 성공하고 있다. 그 새로움은 문체의 힘과 더불어, 박지원과 당대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 그리고 들뢰즈/가타리를 『열하일기』에 적용함으로써 가능했다. 특히 들뢰즈/가타리의 입김은 대단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노마디즘'에 입각한 『열하일기』읽기>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유목', '탈주', '리좀', '외부'와 같은 들뢰즈/가타리의 용어가 목차에서부터 사용되고 있으며, 본문에서는 더 많은 용어와 발상법이 차용되고 있다. 책의 구성이나 서술방식, 전편을 가로지르는 해석의 준거도 마찬가지다.
책은 1장과 2장에서 박지원의 삶과 그의 문체가 당대에 끼친 영향(문체반정)을 다루고, 3장부터 『열하일기』분석으로 들어간다. 고미숙은 박지원이야말로 '접속을 두려워하지 않으나 동시에 떠남도 두려워하지 않는' 유목민이었으며, 『열하일기』자체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천의 고원'이라고 말한다. 천의 고원에는 들어가는 문이나 나오는 문이 따로 없다. 압록강에서 열하까지 장대한 파노라마를 펼치는 대서사시이지만, 고원 하나 하나가 독립된 채로 열린 구조를 가진 풍성한 세계라는 얘기. 이 천의 고원에서는 '친숙함과 낯섦의 끝없는 변주'가 이루어지고, 침묵하고 있던 사물들이 잠에서 깨어나 강렬한 액센트로 말을 걸어 온다. 이 노마드적 여정에서 박지원은 유머와 패러독스의 달인으로, '천개의 얼굴'과 '천개의 목소리'를 가진 호모 루덴스로, 고착화된 주자학의 껍데기를 찢어발기는 새로운 담론 구성의 대가로, 만물의 '사이'에서 사유하며 이름에 갇힌 인간 주체를 뛰어넘는 거대한 철학자로 나타난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즐겁고 유익한 경험이었다. 물론 『열하일기』를 읽는 방식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고미숙처럼 들뢰즈와 가타리에 기대는 것은 그 중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좋음과 나쁨을 떠나, 고미숙은 텍스트를 자유로이 읽을 수 있는 독자의 권리를 보여준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한번 잡고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그 이유가 고미숙이 정말 뛰어난 가이드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박지원이 정말 노마드이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고미숙은 신명을 다해 읽고 썼다는 것. 그리고 자신만의 『열하일기』를 새로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P.S. 고미숙은 <수유연구실 + 연구공간 '너머')>를 이끌고 있다. '수유너머'의 활동이 점차 가시적인 성과물을 내놓고 있어 반갑다. 한국 지식사회에 의미있는 저서들을 계속 생산하기를 빈다. 동시에 서로 너무 비슷해지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여러 저자의 책에서 같은 화법을 발견할 때는 다소 민망해진다. 함께 성장하되 자기 색깔을 잃지 않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