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결혼식인 오늘, 대지 위를 덮고 있는 새하얀 눈꽃이 마치 케이크 위에 뿌려 놓은 하얀색 초콜릿 같아서 참으로 맛있어 보이는 풍경이었다. 길게 늘어선 하객들이 저마다 눈꽃을 밟을 때마다 만들어내는 뽀드득거리는 화음도, 설거지를 깨끗이 하고 났을 때 나는 소리와 같아서 듣고 있는 것도 재미있었다. 회색빛 하늘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잠시 쉬어가더니 축하의 피날레를 장식해주려고 한 건지, 멈췄던 눈송이가 예식이 끝나는 무렵에 맞춰 다시금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창가에 서서 한동안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던 나는 큰 거울 앞에 가서 섰다. 웨딩드레스만큼이나 하얀 내 피부가 곱디고운 새신부의 아름다운 얼굴이라기보다는 얼음성에 사는 공주처럼 창백한 게 오히려 아파 보이기까지 했다. 한참동안 얼굴을 바라보던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입고 있는 아름다운 웨딩드레스에 머물렀다. 짧은 예식 동안 입으려고 며칠을 공들여 골랐다는 생각에 조금은 허탈해지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웨딩드레스에 촘촘히 박힌 다이아몬드를 바라보고 있을 무렵, 베이지색 턱시도를 멋지게 차려입은 철민이 다가와 살며시 내 어깨를 주물러댔다. 피아니스트답게 날렵하고 우아한 손가락은 마치 내 어깨 위를 건반삼아 음을 치듯 유연하게 움직였다.
“힘들지? 끝나고 호텔로 돌아가면 피로가 확 사라지게 내가 마사지 해줄게. 신혼여행을 되도록이면 빨리 떠나도록 하자.”
“나만 힘드나요? 철민 씨도 힘들 텐데 말이라도 너무 고마워요. 그런데 진짜 힘들긴 하네.”
“그럼, 결혼식이 중노동이라고들 하잖아. 그래도 이렇게 예쁜 색시를 얻는 일인데 이런 노동쯤은 감수해야지 않겠어? 그러고 보면 세상엔 공짜가 없는 거 같아.”
“그렇죠. 이렇게 예쁜 색시를 얻는데 공짜로 데려가면 안 되죠.”
“당연하지. 그러니까 설희도 이렇게 멋진 낭군을 데려가서 힘든 거라 생각해. 이런 겉치레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그래야 쏟아지는 눈을 보며 밤새 우리 둘만 있을 텐데. 그렇지?”
“…….”
“어? 왜 대답이 없어? 설희는 나와 단둘이 있기 싫어?”
“……예?”
“뭐야, 내가 말하는데 듣지도 않고 무슨 생각해? 설희는 나 안 사랑해?”
이곳이 호텔방이 아니고 예식장 로비인 게 무척이나 안타깝다는 눈빛을 한 철민이 내게 물어왔다. 뭘 물어보는 거지? 아, 사랑하냐고 물었지. 자기를 사랑하는지 내게 묻는 거야?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날 부추기는 철민의 말투에 그제야 내가 초점을 맞추며 조금은 그윽한 눈망울을 보여주었다. 철민의 말을 듣지 않고 정신없이 오가는 하객들의 모습을 넋 잃고 보고 있었던 게 미안해졌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의 얘기에 집중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입가에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피,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어디 있어요?”
“그럼 왜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해?”
“사랑하지도 않는데 철민 씨와 결혼했겠어요? 안 그래요?”
“그래도 설희는 지금껏 한 번도 날 사랑한다고 말해준 적 없잖아. 매일 나만 하고……. 이거 너무 불공평해. 남자는 대범해야 한다지만 요즘은 안 그래. 남자도 감정 있는 동물이라서 당연히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해.”
피곤한 예식을 방금 마쳤는데 그 잠깐 사이 아이라도 된 걸까. 철민의 낯선 모습에 약간 당황했다. 놀란 채 바라보는 내 눈빛은 안중에도 없는 듯 더한 투정을 부리며 자꾸 내 앞으로 다가와 시선을 방해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달라고 투정 부리는 모습에 그저 난 한참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까짓 것 눈감고 빈말이라도 사랑한다는 그 한 마디만 해주면 될 것을, 난 뭐가 어렵다고 원하는 사람 앞에서 뱉어내지도 못하고 쳐다만 보고 있는 건지. 끝까지 입을 열지 않고 웃기만 하는 내 모습에 철민이 뭔가를 결심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좋아. 설희 입에서 사랑한다는 고백이 나올 때까지 여기서 널 가질 거야.”
“예?”
“널 이 의자에서 가질 거라고. 이 예식장 로비 안에서 사랑하는 유설희를 나 주철민이 가질 거라고. 지금 당장.”
“미쳤어요?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요. 장난하지 말아요. 친구들이 기다리니까 우리도 빨리 내려가야……읍.”
누가 이 새신랑을 말릴 수 있을까.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내 턱을 붙잡고 립스틱이 붉게 발라져 있는 아랫입술을 강하게 빨아당겼다. 마치 달콤한 사탕이라도 먹듯 핥아대다가 갑자기 따뜻한 내 입 속으로 붉은 혀를 쑥 밀어넣었다. 놀란 마음에 머릿속은 멍해지고 이게 지금 무슨 일인지 사태 파악도 안 될 무렵 그제야 주위에서 휘파람 부는 소리에 제정신이 돌아왔다. 고른 치열을 쓰다듬는 철민의 혀는 주위 사람들의 환호에 보답이라도 하는 듯 점점 깊어지더니 더욱 농염하게 입안으로 들어와 가만히 있는 날 깨우고 다녔다.
“그, 그만…….”
“장난 아니라니까. 설희가 장난으로 볼까봐 미리 말해두는데 난 한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빨리 말해.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던가, 아니면 격정적인 자기의 신음소리에 덤으로 고화질 화면보다 더 화질 좋은 포르노를 보여주던가. 어서 선택하라고. 시간 없어.”
“철민 씨, 오늘 참 이상해요. 이젠 그만 하라니까요. 화질 좋은 포르노 화면은 호텔방에서 단 둘이 있을 때 할 테니 지금은 참아줘요. 제발요, 난 철민 씨완 달라서 다른 여자들한테 내 걸 보여주고 싶지 않거든요.”
--- 프롤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