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도 없이 캄캄한 봄밤, 희미한 별빛 아래 두 사람이 섰다. 어머니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당굴은 목에 두 개의 거울을 걸고 있다. 하나는 제몸이 굿판에서 쓰던 것이요, 하나는 부루단지에서 나온 거룩한 몬이다. 바른손에는 간돌칼을, 왼손에는 방울을 들었다. 간돌칼과 방울을 들고 춤을 추던 당굴은 춤을 멈추고 어머니 곁으로 온다. 목에서 거울을 벗어 희미한 별빛을 비춰 어머니의 몸을 훑어본다. 발끝부터 정강이를 타고 허벅지를 지나 불두덩과 아랫배, 가슴을 지나 목과 턱, 입술과 코, 두 눈과 이마를 비춘다. 그러고는 어머니의 목에 둥근 거울을 매달아준다. 어머니는 가슴에 달린 둥근 거울을 당굴의 가슴에 가져다 댄다. 두 개의 거울이 부딪쳐 쇳소리를 낸다. 거울이 부딪칠 때마다 어머니의 두 젖꼭지가 당굴의 가슴팍에 가 닿는다. 뫼에서 몰래 만나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이 소머리 마을의 굿섬 앞에서 벌거벗은 채 사랑을 나눈다. 처음엔 당굴이 위에서 물을 퍼올리듯 허리를 밀다가 나중에는 어머니가 당굴의 위에 올라 불을 피우듯 타올라간다. 아무도 없는 모래톱에서 둘만이 벌이는 굿판을 두 즈믄 해를 이어온 돌칼과 방울이 말없이 지켜본다. 자갈을 차고 흘러가는 가람 소리가 몰래 나눈 두 사람의 오랜 사랑에 밤새도록 손뼉을 친다.
『버드나무는 하룻밤에도 푸르러진다』는 역사 이전의 역사와 현대사를 문화인류학적 서사 담론으로 맛깔스레 형상화한 작품으로 우리 소설사에 마뜩한 무게의, 보기 드문 무늬를 남길 것이 분명하다. 이제 이 소설의 독자들은 불현듯 사는 일이 스산할 때 선사박물관이 있는 파로호의 양구를 찾게 되리라. 삼천 년 전 이 땅의 비극을 예언한 우다간(여성 샤먼)과 그네의 화신인 작가 장주경을 통해 그네들이 묵시한 세 개의 하늘이 열리는 그 이적을 보고 싶은 충동이다. 버들목 나룻가에서 동행하게 될, 이마가 흰 여인네가 이끄는 속수무책의 선사 체험, 어쩌면 세 즈믄 해 전의 혼 하나 몸에 감길 수도 있을 터. 전상국(소설가, 강원대 명예교수)
삼천 년 전의 아낙 아로와 오늘의 여인 야진 사이에는 고인돌 한 구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소멸에 대한 공포와 미련, 목숨의 흔적에 대한 집착. 사람들은 아무런 흔적 없이 저 세계로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삼천 년 전에도. 이 흔적의 열망을 읽어내는 이가 과학자나 고고학자가 아닌 평범한 주부라는 설정이 『버드나무는 하룻밤에도 푸르러진다』의 매력이다. 고인돌에 우주의 신비(별자리)를 새기고자 하는 다륵의 꿈은 지상의 유한성에 천상의 무한성을 각인하는 예술이 된다. 운명의 철책을 넘어서고자 하는 아로와 다륵이 살았던 세계는 잃어버린 총체성과 풍요로운 비밀로 가득한 유토피아다. 야진이 무뚝뚝한 고인돌의 침묵에서 우주를 품어 안는 미소를 읽어낼 때. 몰락 이 후에야 시작되는 구원의 메시지가, 커다란 문들이 켜켜이 닫혔을 때 비로소 열리는 좁은 문의 기적이 시작된다. 삼천 년을 건너뛰어 오가는 두 여인의 복화술이 농밀해질수록, 독자 또한 삼천 년 전의 가시버시, 아로와 다륵과 편지를 주고받는 착시를 느낀다. 이 콘크리트 벽 아래에도, 삼천 년 전에는, 아로와 다륵, 흘달과 인니와 검님들이 살아 있지는 않았을까. 과학으로 복원될 수 없는 기억의 흔적, 육체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마음의 흔적들이 조용한 춤사위를 시작한다. 죽은 자의 명예를 기리느라 미처 보호받지 못한 산 자의 넋이, 가냘픈 아가미로 숨을 쉬기 시작한다. 정여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