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가들은 간디가 고집스럽게 손으로 실을 잣는 일에 집착하고 있다고 비웃는다. 물론 간디도 물레가 비경제적인 기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물레는 값이 쌀 뿐만 아니라 아주 적은 기술만 필요로 하고, 1년 중 몇 달 동안에는 거의 할 일이 없는 수백만의 가정에 적어도 최소한의 수입이나마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인도를 영국의 섬유 공업의 의존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방법을 바로 물레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인도는 대부분의 수입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옷을 입기 위해서는 천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로서는 카르카(carka:물레)가 바로 자치(스와라지)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간디는 이것이 국가의 상징으로서 인도 국기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물레를 그의 캠페인의 중심으로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자신의 옷을 바꾸고, 1921년 9월부터는 단지 천으로만 된 덧옷만을 입고 다녔으며 이것만 보면 누구나 그가 간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간디는 자신의 생애 내내 항상 자신의 정신적인 입장을 공공연하게 그의 옷으로써 표현했다. 이로써 그는 제대로 된 옷을 만들려고 카디를 넉넉하게 사기에는 너무나 가진 것이 없고 단지 덧옷으로만 만족해야 하는 가난한 자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 축에 스스로 끼여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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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3월 11일이 되었다. 긴장은 비등점에 달할 만큼 고조되어 있었다. 이것은 인도뿐만이 아니었다. 세계 언론은 아메다바드에 집중되었고 우편과 전신을 마비시킬 정도였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사마르마티 아슈람을 둘러싼 채 야영을 하고 있었다. 3월 12일은 여느 때처럼 아침 기도로 시작되었다. 그 직후에 간디는 78명의 남자들과 함께 자신의 아슈람을 떠나 남쪽으로 바다를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름과 개인 신상은 그 전에 이미 [영 인디아]지에 공개된 상태였다. 경찰은 이들을 단지 지켜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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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수업 시대와 방랑 시대는 이것으로 끝이 났다. 법정에서 변론할 자신도 없었던, 수줍음을 타고 일에 서투른 한 젊은 변호사였던 그가 시민 불복종의 전략적인 계획에서뿐만 아니라 집회에서 연설가로서 또한 시위에서는 대담한 지도자로서 민중들을 이끄는 정치가가 되었던 것이다.
조국을 위해 희생하는 모든 기회를 기뻐하는 애국심, 어려움이나 위험 때문에 자신의 의도를 굽히지 않는 두려움을 모르는 마음, 깊고도 흔들리지 않는 신의 섭리에 대한 믿음, 이 모든 것으로 무장해서 봉사자들은 자신의 사명을 시작해야 하며, 조국 대한 봉사를 위해 정력을 다할 때 생겨나는 기쁨을 경건하게 찾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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