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에 이르러서는 親中主義, 親美主義, 親日主義, 從北主義 등의 문제도 얽히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知彼知己의 認識으로서 상대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이내 그릇된 결정을 하게 되기 십상이다. 예컨대, 조선왕조 말기에 이루어졌던 일련의 정치적 결정들은, 그러한 그릇됨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런데 단지 개인의 결정이라면, 그 反響이 微微할 수 있지만, 공동체의 집단적 결정이라면, 국가공동체 자체가 소멸될 수도 있다. 그러니 東西古今을 막론하고서 知彼知己의 자세는, 삶의 태도로서 참으로 결정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도, 현재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미국이나 중국의 속내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한다면, 자칫 그릇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랬다가는 조선왕조 말기의 前轍을 밟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나아가 북한이나 일본에 대한 理解 역시 그러하다.
특히 북한은, 남한에게 있어 가장 직접적인 분석의 대상이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온갖 이성적 논리와 분석들이 넘쳐나며, 갖은 감성적 조작과 왜곡들이, 쉼없이 ‘生存의 利得’이라는 혼돈 속으로 이끈다. 그러나 참으로 자명한 것은, 현재의 대한민국을 존속시켜 남북통일을 실현시키며, 故土 滿洲를 수복하는 발전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등을 더욱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릇된 결정을 피할 수 있다. 일본 근대의 사무라이 사상가들을 살피는 까닭 역시 그러하다. 그러니 마음 같아서는, 저 먼 古代로부터 소급하여 韓中日의 관계를 고찰하고 싶지만, 필자가 그러한 작업이 실제적으로 실행될 수 있을지는, 다소 의문이다.
하지만 그저 무관심할 수 없으므로, 우선 현대사회에 결정적 인과관계를 가지는, 일본 근대사회를 우선 살피고자 한다. 일본 근대사회를 대변하는 역사적 사건은, 두말 할 나위 없이 ‘메이지유신’이다. 그런 메이지유신을 살핌에 있어, 당시 메이지유신을 주도했던 사무라이 사상가들에 대한 고찰은 필수적이다.
특히 ‘사이고 다카모리’,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는, 當時는 물론 현재까지도 일본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 인물들이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은 캐릭터들이 존재하므로, 여건이 허락한다면 향후 고찰해 나갈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考察로써, 필자는 물론 독자들 역시 적잖은 공부가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일본이 단지 배척의 대상일 수만은 없으며, 地政學的으로도 不得已하므로 항상 유념해야만 하는 대상임을 인식케 될 것이다. 韓民族의 東夷文明이 오랑캐의 문명이 아니듯이, 현대의 일본인 역시 倭寇쯤으로나 비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오랜 세월 동아시아 문명이, 부득이하게 중국문명 중심으로 재단되어버렸지만, 이제는 持難한 事大主義의 굴레를 벗고, 우리 민족의 歷史와 政治를 재정립해만 한다. 慘酷한 植民主義의 굴레 역시 그러하다. 그렇지 않다면, 메이지유신 세력에 의해 소멸해버린 末期 朝鮮王朝나, 한갓 그림자에 불과했던 大韓帝國처럼, 우리 민족의 미래는 결코 밝지 못할 것이다.
메이지유신을 작동시켰던 動力으로서 ‘대동아공영권’ 개념에 대해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입장에서, ‘대동아공영권’과 연합국과의 전쟁 裏面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中國이라는 市場이었다. 일본은 미국의 인가를 받던 중국 시장에 대해, 일본만의 ‘특별한 관계’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장들의 잠재적 富의 풍부함을 인식한 미국은, 일본이 중국으로의 수출에 있어서 우위를 갖게 하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일본 제국은, 중국 시장에서의 일본의 공식적인 이점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로서, 처음에는 중국을 침략하고, 나중에는 ‘대동아공영권’을 추진했다. 일본의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에 따르면, 일본이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성공한다면, 지도국으로서 동아시아를 통합할 것이고,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말은, 일본 제국과 동의어가 될 것이었다.
‘대동아공영권’은,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붕괴했다. 일본은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 反西歐 감정을 활성화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대동아공영권’으로서 아시아의 통합을 실현하지 못했다. 결국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상상적 괴물은, 거대한 ‘Great Game’의 場에서, 자기편의 ‘생존의 이득’을 목적하는 泥田鬪狗였다. 그런 것이 국제정치의 실상이다.
실상, 어느 국가공동체라도 覇權國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다. 다만 그것을 실현할 실제적인 여건과 역량이 없을 따름이다. 우리 민족도, 21세기에 이르러, 檀君朝鮮이나 高句麗라는 帝國의 역사를 되살피고 있다.
그 까닭은, 비록 事大主義와 植民主義에 의해, 오랜 세월 동안 자의반타의반으로 은닉되었지만, 미래의 대한민국이 남북통일 후 故土 만주를 수복하고, 옛 신라와 백제의 故土인 중국대륙과 일본열도를 수복하는 것 역시, 반드시 실현코자 하는 국제정치적 욕망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욕망은 실로 정당한 것이다.(본문 중에서)
대체로 ‘사무라이(侍)’는 일본 封建時代의 武士를 뜻한다. 본래는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뜻의 단어, 시(侍)에서 나온 말로써, 귀인을 경호하는 사람을 가리켰으나, 헤이안 시대 이후, 일반적인 무사를 가리키게 되었다. 주군을 잃은 사무라이는 ‘로닌(浪人)’이라 불리며, 칼솜씨를 제외한 기술이 없어, 특별한 직업 없이 유랑하거나 걸식하며, 살인청부와 도적질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조선왕조 말기 乙未事變 당시, 동원되어 閔妃를 살해한 집단이 바로 ‘로닌’이다. 고대 일본에서 浪人이란, 호적에 등록된 본적지에서 떠나, 타국을 유랑하는 사람을 의미하여, ‘후로(浮浪)’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는, 특정한 신분과는 관계 없이,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었다.
이에 대하여 ‘로닌(牢人)’은, 주군의 가문을 잃거나 떠나게 되어, 봉록을 잃게 된 사람을 말한다. ‘낭사’라고 부르기도 하며, 일본 역사상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에 걸쳐, 주종 관계를 갖는 무사(武士)와 사무라이(侍)에만 해당하는 좁은 의미의 신분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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