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끔 말이다, 이 엄마가 견디다 못해 방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옷장에 가지런히 정리하는 날이 있지. 엄청난 에너지의 투입으로 허리가 빠지는 날이야. 물론 곱게는 아니다. 한바탕의 연설과 치우지 않으면 버리겠다는 협박과 걱정을 가장한 적당한 충고와 함께이지. 엄마는 노동력을 투입해 네 방을 ‘질서’ 있게 만드는 일을 하지. 에르빈 슈뢰딩거는 생명체란 바로 그런 것이라고 했어. 흩어져 있는 무질서한 것들을 모아 엄청난 에너지를 투입해 질서를 만드는 것. 그 에너지 투입의 결과 단백질과 핵산이라는 거대 분자구조가 만들어지고, 이후 세포가 만들어지며, 세포가 모여 기관을 이루고 개체를 이루어 눈에 보이는 형상의 질서를 만드는 것, 그게 생명이라는 것이지. --- p.22
허무하지 않니? 사춘기의 미묘한 불안함, 호르몬의 왕성함에 의한 사춘기의 상징 여드름, 복잡한 인체기관, 머리카락의 색깔, 키, 이 모든 것이 오로지 4종류 핵산의 배열에 의해 정보로 저장되어 있다가 때가 되면 발현된다는 것이? 그래서 더욱 놀라운지도 모르지.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지. 모두가 다르잖아? 정보 저장의 원리가 이렇게 단순한데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 놀랍지 않니?
단순함에 의한 아름다움을 극찬한 과학자가 있어. DNA의 구조가 이중나선이라는 것을 왓슨과 크릭이라는 과학자가 밝혔는데, 사실 숨은 공로자가 한 명 있어.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라는 여성 과학자가 거의 모든 것을 밝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런데 말이야, 왓슨과 크릭이 자신의 결과를 활용해 만든 DNA 이중나선 모형을 보여줬을 때,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이렇게 단순하고 아름다운 구조가 사실이 아닐 리가 없다”라고 했어. 단순함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과학자였던 거지. --- pp.35-36
엄마 아빠에게 나타나지 않는 너의 새로운 표현형. 그게 변이에 의한 것이라면 그건 어쩌면 유전적 다양성을 갖게 하는 시작일지도 모르잖아? 그거 말고 엄마 아빠보다 더 뛰어난 유전형질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아직 그게 표현되지 않았을 뿐이지. 아니 우리가 아직 못 찾았을 거야. 물론 어떤 유전자는 현재에는 그리 좋지 않을 수도 있으나 그게 환경이 다른 미래에는 다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잖아.
그리고 중요한 건 네가 최상의 조합이든, 최악의 조합이든 그게 유전자를 남기는 부모 입장에서 보면 중요하지 않아. 정말 최상과 최악의 조합이 있어서 네가 최상의 조합으로 태어났다면 혼자 잘 알아서 하는 것이고, 최악의 조합이면 어떻게든 내 유전자를 잘 보존하려고 최상의 조합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할지도 모르잖아. 이건 진짜 그냥 엄마 생각인데, 곳곳에서 드러나는 너의 뛰어난 생존전략을 보고 판단하건대, 넌 미토콘드리아 이브 같은 존재, 최선의 선택이 될걸? --- pp.116-117
너는 다행히도 유전적으로 헤모글로빈 상태가 정상이어서 빈혈은 없잖아. 꾀병처럼 가끔 어지럽다고 어리광부리지 말거라. 그건 네가 철분을 많이 먹지 않아서야. 헤모글로빈을 만드는 유전자는 정상인데, 헤모글로빈에 들어 있는 철분이 없으면 산소가 어디에 결합해서 운반되겠니? 그러니 철분이 많이 들어 있는 당근 품은 달걀말이, 시금치 등을 많이 먹으렴. 그냥 철분제 먹으면 안 되냐고? 그것도 하나의 방법인데, 네가 철을 씹어 먹는다고 몸속에 흡수되니? 안 되지? 물론 철분제가 철과 같은 형태는 아니야. 하지만 음식에 포함되어 있는 철분과 같은 무기염류는 철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 몸이 잘 흡수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거든. --- pp.153-154
이 아픈 건 좀 나았니? 약 먹어 부기도 가라앉았고, 아픈 것도 줄어들었겠지. 치료 받았으니 이제 괜찮아질 거야. 그래 다행이다. 아픈 게 나아서 다행인 게 아니라, 아픈 걸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거야. 딸이 아파서 다행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냐고? 불량한 엄마라도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아프다는 건 네몸에서 일어나는 신호를 네가 인지한다는 거잖아. 통증이 없으면 아픈지도 모르고, 병원에 갈 생각도 안 할 거잖아. 그러니까 통증은 “내가 아프니까 빨리 병원에 가라”라고 몸이 알려주는 거지. --- p.198
“넌 도대체 뭐니?”
“사람, 그럼 엄마는 뭔데?”
“엄마도 사람이지.”
우리는 이런 대화를 너무 많이 주고받았다. 선문답 같은 이 얘기들에 대한 답이 결국은 사람이었고, 결국은 생명체였지. 그래. 이 선문답 같은 질문을 통해 힘들 것 같았던 사춘기 딸과 불량 엄마의 간극이 조금은 좁혀졌을까? 안 좁혀졌을 지도 몰라. 하지만 적어도 형이하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불량엄마는 너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게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해.
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이 불량기 가득한 엄마의 도발적 질문으로 인해 불량엄마를 향한 너의 말문은 트였잖아. 침묵은 아닌 거지. 그래서 이 시점에서 처음 너에게 했던 질문으로 다시 시작하려고 해. 너는 도대체 뭐니? 아니, 이제는 질문을 좀 바꿔야 할지도 몰라. 말문이 트였으니 “너는 도대체 뭐니?”가 아니라 “우리는 도대체 뭘까”로…....
--- p.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