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끼릭- 끼릭-
치익!
“헉… 헉…….”
급격한 가속과 정지의 연속.
바닥 면과 심하게 마찰이 일어나 살짝 고무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아니, 선수들 본인들에게는 그 냄새가 확연하게 느껴질 것이다.
“스읍.”
숨을 잠시 멈추고 찰나의 순간을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한다.
후드득 땀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도, 속눈썹에 맺힌 땀도 그 순간만큼은 방해되지 않는다. 뜨거우면서 차가운, 완전한 긴장이 안광으로 쏘아진다. 몸에서 발산되는 어스름한 열기가 오라처럼 흐느적거린다.
후웅-
팽팽하게 긴장된 근육이 꿈틀거리고 아름다운 곡선이 그려진다.
펑!!!
공이 짓눌렸다가 튕겨 나간다.
상대방에게 쏜살같이 날아간 공은 이윽고 엄청난 회전력으로 인해 곡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쿵 소리가 났을 거라 착각할 정도로 공은 맹렬하게 떨어졌다가 다시 튀어 오른다. 형광색의 작은 공은 삐죽 나온 솜털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종 회전을 보이며 무려 1.5미터에 가깝게 튀어 올랐다.
준수한 톱스핀.
그러나 상대도 부지런히 움직여 맞받아친다.
그렇게 대포 소리를 내며 몇 번의 랠리가 이어졌고, 승부는 났다.
“피프틴 올.”
까마득한 여정의 도중.
새파란 코트에 광대하게 쏟아지는 햇빛이 눈부신 이곳은 패럴림픽 휠체어 테니스 남자 부문 결승전이 진행되는 곳이다.
***
1세트 6 : 4 이영석 승.
2세트 2 : 6 사핀 승.
3세트 5 : 5 타이브레이크 진행 중.
펜을 들어 노트에 시합의 상세한 과정 전부를 기록하고 있는 진희가 물끄러미 영석을 바라보았다. 결코 그 누구에도 보여주지 않았던 심유한 표정과 얼음장 같은 눈길이 영석의 온몸을 분해하듯 살피고 있었다.
“또 발전했어… 따라잡으려면… 얼마나 걸릴까.”
분한 듯 진희의 몸이 잘게 떨렸다.
“널 사랑하지만, 질투가 난다 이거야…….”
말 그대로 진희에게 영석은 세상의 전부다.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이기고 싶은 존재인 샘이다. 남자와 여자의 신체 차이? 그런 건 진희에게 비겁한 합리화로 느껴졌다. 끝없는 애정과 불타오르는 의지가 뒤섞인 진희의 시선이 영석에게 머물렀다.
퉁, 퉁.
서브를 준비하며 공을 코트에 튕기는 영석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리와 팔, 눈동자 모두 큰 진폭을 그리며 떨고 있었다. 고작 3세트의 경기임에도 그동안의 체력 단련이 무색하게 지쳐 버린 것이다.
‘너무 쏟아냈나…….’
체감으로 10초 정도가 지났음을 느끼고, 영석은 공을 하늘에 띄웠다. 그간의 연습이 빛을 발하듯, 높게 토스된 공은 시합 내내 원하는 곳에서 단 1밀리도 어긋나지 않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스읍!”
숨을 삼킨 영석이 뒷다리의 힘을 끌어왔다. 대지의 힘이 발바닥을 통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그 힘은 긴 끈을 대지에 둔 채, 뱀처럼 영석의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다. 마침 토스한 공이 가장 높은 위치에서 잠시 멈출 때, 영석의 눈이 번뜩이며 서브의 동작이 급속도로 전개됐다.
머리 뒤에 머물던 라켓이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공을 향해 나아갔다. 동시에 대지에 묶였던 발이 두둥실 떠올랐다. 점프한 것이다.
“후우우… 악!!”
펑!!!
단순한 호흡을 넘어서 비명과도 같은 기합이 영석의 의지와 상관없이 입에서 삐져나왔고, 점프까지 하느라 엄청나게 높은 타점에 머물던 공은 기괴하게 찌그러지며 사핀을 향해 눈 깜짝할 새에 뻗어 나갔다.
와이드로 뻗어올 걸 기다린 사핀은 공이 센터를 향해 오자 허겁지겁 다리를 놀렸지만,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라켓에 닿지 않은 공은 한 번 바운드됐음에도 불구하고 사핀의 뒤편 벽에 맹렬하게 처박혔다.
‘뭐 저런 녀석이…….’
사핀은 내심 감탄했다.
흔히 테니스 선수를 논할 때, 랭킹 10위 안에 드는 선수와 100위권인 선수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한다. 그 말은 맞으면서 동시에 틀렸다. 종이 한 장만큼 하잘것없어 보이지만, 그건 종이 한 장이 아니라, 재능 한 장이다. 그걸 극복하긴 요원한 일이다.
‘저 녀석… 3세트 시작하고 나선 사람이 바뀌었어.’
시작은 사핀 자신이 영감탱이라고 부르는 코치의 조언대로 영석이 포핸드를 치면서 포문을 열었다. 폴짝 뛰면서 치는 게 아무리 봐도 웃겨서 시합 도중에도 불구하고 크게 웃으며 코트를 굴러다녔다.
하지만 그렇게 딱 세 번의 시행착오를 거쳤을 뿐이다. 몸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순식간에 익숙해져서 자유자재로 다루더니 백핸드까지 덩달아 좋아졌다. 잭나이프를 때려대는 통에 공을 쫓아다니느라 사핀이 포인트를 꽤 잃은 것이다. 이 이상한 페이스는 영석이 서브까지 점프해서 때려대며 더욱 상승세를 탔다. 결국 5 : 5 듀스인 상황까지 몰린 것이다.
“그래그래, 유망주 하나가 번쩍― 하며 혜성같이 나타났구나. 그래… 그럼 넌 지금부터 애거시다. 아니, 샘프라스다.”
중얼거린 사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며 눈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집중력을 끌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급변한 분위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코트 반대편에 있는 영석도 느낄 수 있었다. 사핀의 몸을 타고 뿌연 아우라가 안개처럼 번지는 것 같아 보일 정도다.
‘이제야 시합 모드로 나오는 거야? 난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는데…….’
영석이 내심 혀를 찼다.
아무리 발악해도 지금은 못 이길 걸 알면서도 온 힘을 다했지만, 경기 막판에 와서야 더 집중력을 끌어 올리는 사핀을 보며 영석은 의지가 꺾이려는 것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하지만 힐끔 바라본 자신의 다리와 팔 모두는 이미 한계 상태임을 알리듯 부풀었던 근육이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코를 찌르는 악취까지.
‘몸에서 진액이 나오는구나, 진액이.’
패배를 기정사실화한 영석이지만 입꼬리에는 투쟁심 넘치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