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빠르게 색깔을 바꾸어 가는 바다에서 시선을 옮겨 젊은이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제 이야기,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어. 우리 하루카는 함부로 낯선 남자를 따라갈 애가 아니니까. 히라사와의 말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도. 병실에 누워 있는 하루카를 보는 순간, 너무 두려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나를 자해하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 하루카를 내팽개치고 말았어 …. 변화도 없이 늘 정해져 있는 일상을 그렇게 지겨워한 주제에, 정작 그 일상에서 벗어난 일이 일어나자, 너무 귀찮아서 안 보이는 척 못 들은 척하며 일상에 달라붙어 있으려 하고 말았지.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야.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느냐고, 하루카를 원망하기도 했어.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었어 …. 그 애가 어떤 곤경에 처하더라도, 전 세계가 그 애의 적이 된다 해도, 무조건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도 … 나는 나의 약점에서 눈을 돌려 버리고 말았어. 서글픈 일이야, 정말로 …."
나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나이가 될 때까지 강하거나 약하거나 아무래도 좋은 그런 생활을 해왔지만, 자네들을 만나면서 난 바뀌었어. 이제는 절대로 나의 나약한 점에서 눈을 떼지 않을 거야."
--- p.161~162
"왜 박순신의 뺨을 때렸죠?"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나는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박군 때문이 아니야. 나 자신이 너무 서글퍼서 … 나에 대한 짜증을 박군에게 풀려고 했던 거야."
"그게 무슨 말이죠?" 하고 이다라시키가 물었다.
"박군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난 깨달았어. 그의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분노는 내가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사이에 생겨난 거야. 내 책임이야 …."
"그럴리가."
미나미가타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깐 채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힘껏 살아왔어. 다른 사람에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어. 그렇지만 지금은 모든 게 부끄러워. 박군의 말대로, 나는 지금까지 반경 일 미터 정도의 시야밖에 갖지 않았던 거야. 우연한 기회에 자네들을 만나 그걸 깨닫게 되었지 …. 나는 박군을 위해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그 같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어 …. 그에게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싸우게 하고 싶지 않아 …. 나는 고작 샐러리 맨이고 세상을 바꿀 힘도 없지만, 그 대신에 그를 지켜 주고 싶어 …. 나는 …"
얼굴을 들고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나는 말을 이었다.
"나는 강해지고 싶어."
--- p.110~111
사, 오, 육, 칠 …
스무 번째부터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아킬레스건이 늘어질 대로 늘어져 한계에 달한 느낌이었다.
"끊어질 거야. 아킬레스건이 끊어질 것 같아."
옆에서 부덤덤하게 오르고 있는 박순신에게 호소했다.
"안 끊어져!"
박순신은 단언했다.
"만일 끊어지면 병원에 데려다 줄게."
개자식 …
서른 번째에 뒤꿈치가 바닥에 닿고 말았다.
"처음부터 다시."
박순신은 그렇게 말하고 서른 번째 계단에 퍼질러 앉아 버렸다.
"오늘은 여기보다 한 계단이라도 더 오르면 그만 해도 좋아."
나는 돌계단 중앙에 설치해 놓은 손잡이를 잡고서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 이, 삼, 사 …
스물두 번째 계단에서 뒤꿈치가 바닥에 닿고 말았다.
"처음부터. 오를 때까지 계속."
박순신은 돌계단에 걸터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내가 반항할 양으로 스물두 번째 계단에 그냥 서 있자 박순신은 책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그만 둬도 상관없어. 나도 빨리 집에 가고 싶으니까. 아저씨도 빨리 집에 가서 분재라도 손보는 게 좋겠지."
씨팔 …
나는 돌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말했다.
"내가 그만둘 줄 알고!"
박순신은 코웃음을 쳤다.
씨팔 …
일, 이, 삼, 사 …
결국 나는 오기만으로는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걸 배웠다. 아무리 해도 서른 번째 계단까지 오르지 못한 나는, 손잡이를 잡고 올라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마침내 서른 한 번째 계단에 오를 수 있었다.
--- p.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