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추상 능력은 지적 도약이었다. 윤회와 인간의 행위(karma, 業)에 대한 오래 묵은 사유를 윤리화한 것 또한 인류 문명의 위대한 발전이었다. 붓다의 업설(業說)은 논리 측면에서 붓다 사상의 중심이다. 업은 작용이지 존재가 아니다. 나아가 업은 우연적인 것도, 완전히 결정된 것도 아니다. _8~9쪽
나는 붓다가 서양철학 전통을 창시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동등한 수준이라고 감히 주장한다. 붓다의 사상이 전 세계 아동 교육에 포함되어야 하고, 그로써 세상은 좀 더 온화하면서도 지적이고 문명적인 곳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_24쪽
붓다와 나 사이에 놓인 시공간적 간격을 고려한다면 내가 그의 사상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나는 그의 이론들 중 일부는 동의하지 않으며, 그의 가치관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스스로 불교도라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상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생긴 존경심은 적어도 자신을 불교도로 여기는 많은 사람과 비견할 만하다. _24쪽
붓다는 그의 사상을 이해시키기 위해 상대방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엔 다른 언어가 없었던 것이다. … 붓다는 기존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이로 인해 불가피한 오해가 빚어졌고, 그의 가르침을 피상적인 부분만 알았던 이들에게 특히 그러했다. … 현대 인도의 대학 교육과 출판물을 살펴보면 붓다가 브라만교의 성전(聖典)인 우빠니샤드와 사실상 동일한 가르침을 전했을 뿐이며, 붓다가 다른 점은 카스트 제도를 부정했다는 것뿐이라는 관점이 늘 선전된다. 이러한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는 붓다의 주 논적이 우빠니샤드적 관점을 지닌 브라만들이었기에 브라만들을 비판하는 데 그들의 용어를 차용했기 때문이다. _26쪽
붓다를 오로지 종교적 지도자로만 여기는 것은 무익하다. … 이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오늘날 불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오히려 장애가 될 수도 있다. _29쪽
붓다 사유를 뒷받침하는 가장 오래되고 광범위한 증거는 텍스트의 방대한 집대성인 빨리어 정전(正典)에서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_31쪽
붓다는 상대방이 먼저 말한 뒤 우선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하고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통상적인 기술이었다. 붓다는 말한다. “그러하다. ~ 그리고 ~” 이는 누구나 배울 수 있는 훌륭한 협상이자 외교 전략이다. 붓다는 항상 적대적인 태도를 피한다. _34쪽
붓다는 ‘제의’를 뜻하던 브라만교 단어를 가져와, ‘윤리적 의지’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 단순한 조치는 카스트에 기반한 브라만적 윤리를 전복시킨다. _45쪽
자이나교가 끼친 영향은 붓다가 승단을 조직한 방식에서 더욱 막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분명 붓다는 비구 승단 외에도 비구니 승단을 갖추어야 함을 배웠다. 우테 휘스켄(Ute Husken)의 주장에 따르면 붓다가 승단에 비구니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는 설은 붓다 재세 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며, 나 또한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_116쪽
붓다의 삶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붓다가 자이나교의 수행을 직접 시도해본 뒤 거부했음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_124쪽
붓다의 위대한 개혁은 윤리적 가치가 외적 요소가 아닌 의지에 따라 판단되도록 만든 것이다. _125쪽
‘영혼(soul)’이라는 단어의 용법 자체가 그러한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기에, 불교의 무아 개념을 ‘무영혼(no soul)’으로 번역할 경우 아무리 잘해봤자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 불교에는 업이라는 강력한 연속의 법칙이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이 주제에 관한 논의에서 ‘영혼’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영혼이라는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인도 불교가 무아의 가르침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무아는 사실상 불교를 대표하는 표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하에, 영어권에서 항상 사용되어온 ‘무영혼(no soul)’보다 무아를 더 잘 전달할 표현이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_133쪽
빨리어 사본에 따라 붓다가 특정 설법을 펼친 장소가 여러 곳으로 등장하는 일이 빈번했다. 나는 그 차이점을 해석하려면 또 다른 빨리어 사본을 대조해야만 했다. 놀라웠던 점은 어떤 빨리어 표현이 모호하게 보이는 경우, 한역본은 이를 생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_199쪽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베다 전통에서 의식과 그 대상은 불에 빗대어 사유되었다. 붓다는 『갈애 멸진의 긴 경』에서 동일한 사유를 활용하지만 좀 더 분석적이다. 붓다는 의식이 연료로 삼을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욕망적’ 작용이라는 점에서 불과 비슷하다고 본다. _242쪽
붓다의 주요 제자들 중 여럿이 브라만 출신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브라만교의 실제 관행은 가혹히 비판받는다. 어떤 문헌에서는 이러한 비판이 직접적이며, 자이나교가 비판했던 것과 동일한 사항을 주로 비판한다. _349쪽
브라만교 최상의 창조신인 브라흐마는 붓다의 마음을 읽고 깜짝 놀란다. 브라흐마는 붓다 앞에 나타나 무릎 꿇고는, 이해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며 설법의 간청을 세 번 반복한다. 브라흐마는 붓다의 동의를 얻자 그제야 자신의 천국으로 돌아간다. … 불교의 우월성을 이보다 더 노골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_3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