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벽에는 ‘네메시스’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본부장님은 아실지 모르겠지만 네메시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복수의 여신인데 올바른 어원은 ‘복수’가 아닌 ‘의분’입니다. 정확하게 보면 살인의 동기도 의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지?” “피해자와 가까운 사람이 저지른 복수라면 사분이라고 불러야 하겠죠. 하지만 의분이라면 집행자는 제삼자가 됩니다.” “자신을 정의의 사도라고 믿는 사람이 벌인 짓이라는 건가?” “아뇨. 단지 그뿐이라면 단순한 사적 형벌이지요. 의분으로 해석하면 조금 성가신 측면이 있습니다. 바로 복수의 대상이 법무성일 경우입니다.” --- p.50~51
“여기서는 지낼 만하나?” 그러자 가루베는 히죽 웃으며 아크릴판에 얼굴을 갖다 댔다. 비밀 이야기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징역이라고 해도 다리가 풀릴 정도로 고된 육체노동을 시키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무기 징역도 모범수만 되면 가석방 가능성이 있고요.” “요즘은 가석방 확률이 점점 낮아지고 있어. 재범률이 줄 기색이 없으니.” “아,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못 나가면 또 못 나가는 대로 상관없습니다. 여기 있으면 삼시 세끼 밥이 딱딱 나오고 아프면 의사한테 공짜로 진찰받을 수도 있죠. 형사님. 재범률이 떨어지지 않는 건 담장 바깥보다 이곳에 있는 게 더 편해서가 아닐까요?” --- p.61~62
인간은 근묵자흑이다. 악독한 인간들 사이에 던져 놓고 사람을 교화하고자 하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 악인을 진정 선인으로 만들고 싶으면 선인 집단에 집어넣는 것이 마땅한데, 위정자나 공무원은 어느 하나 그런 방법을 제안하지 않는다. 아니, 제안하지 않으니 위정자와 공무원으로 살아갈 수 있다. 상관없어. 어쨌든 사가라는 ‘온정 판사’ 덕분에 구사일생을 얻었다. 모처럼 길어진 생명줄을 보다 평화롭고 안온하게 지키고 싶었다. 담장 밖에서 얼빠진 복수의 사도가 살육을 반복해 준다면 자신은 안전지대에서 느긋이 구경하면 된다. --- p.147~148
인터넷 세계는 더더욱 뜨거웠다. 실명으로 글을 올리는 SNS에는 역시 온건한 의견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러지 않은 커뮤니티 게시판과 트위터 등지에서는 ‘네메시스’에 대한 칭찬이 쏟아졌다. 그의 행동 원리가 복수의 대행이었다는 점이 누리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네메시스’는 일약 영웅 칭호를 얻게 되었다. ‘네메시스는 이름 그대로 신이다!’ ‘이 나라에는 마음 편히 눈을 붙이는 가해자 가족이 많지. 절대 도망치게 두지 마라. 앞으로도 피해자 유족의 한을 풀어 줘!’ ‘사형 하나 못 하는 게 무슨 법치 국가냐.’ ‘지금 당장 법무 대신은 사임하라. 후임은 네메시스로!’ ‘경찰은 네메시스 검거보다 쓰레기 같은 가해자 가족들부터 단속해라. 범인을 양산한 장본인들이니 똑같은 죄를 물어야 하지 않나?’ --- p.210
네메시스가 우리를 노리고 있는 것 같다. 이마오카 미유키, 나나코 모녀가 다카사키 경찰서에 신변 보호를 요청한 건 12일 오후 8시 10분이었다. 신고를 받은 다카사키 경찰서는 애초에 단순한 스토킹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봤지만 모녀의 정체를 알자마자 ‘네메시스 사건’ 수사본부에 연락을 해 왔다. --- p.304~305
부조리한 이유로 타인의 목숨을 앗아 간 자에게 동등한 죽음을 선사하는 건 거시적으로 보면 자비와 마찬가지인 겁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원한에 노출되지 않고, 고통도 느끼지 못하죠. 세상에는 죽음보다 더 가혹하고 잔인한 형벌이 있는 겁니다. 극형이란 건 사형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은 이들이 저에게 사형 폐지론자라는 딱지를 붙이는 건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죠. 아마도 그들이 진정한 고통이라는 걸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요.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