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처음 세상에 내놓은 지 4년 만에 전면 개정판을 내게 되었다. 기존의 미진한 부분들을 보완하고, 자료를 대폭 보강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의 초판이 나오는 데도 4년이 걸렸다. 그 첫 2년은 이 역사적 사실에 매료되어 책 읽기에 바빴고, 나머지 기간은 구상과 집필에 매달렸다. 2009년 1월부터 시작된 『술탄과 황제』와 나의 동행은 이렇게 8년 세월이 흘렀다.
첫 출간과 함께 찾아온 관심과 성원은 고맙고 놀라웠다. 국내 거의 모든 언론 매체와 평단 그리고 학계에서까지 몸 둘 바 모를 찬사를 보내주었다. 덕분에 책도 잘 팔리고 이곳저곳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고 어깨가 으쓱했지만, 한편으론 걱정을 동반한 책임감이랄까 사명감 같은 것이 생겨났다. ----「저자의 말」중에서
그렇다, 종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453년 4월,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거대한 군사를 이끌고 제국으로 쳐들어와 콘스탄티노플을 완전히 포위해버렸다. 급기야 그해 5월 29일 화요일, 54일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난공불락의 철옹성은 무너지고 오스만 깃발이 하늘 높이 나부꼈다.
이로써 21세의 젊은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오스만 제국의 역대 술탄 가운데서 유일하게 ‘파티(Fatih: 정복자, The Conqueror)’라는 존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바야흐로 ‘파티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은 ‘세계 모든 도시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가 지켜주는 도시’라는 찬사를 접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새롭게 탄생하면서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기독교 신앙의 전당이었던 하기아 소피아 역시 아야 소피아(Ayasofya)란 이름의 이슬람 모스크로 거듭났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시작한 이 제국은 개국시조와 이름이 똑같은 콘스탄티누스 11세에 이르러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까지 영속하리라 믿었던 제국의 역사는 그렇게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동시에 그 자리엔 인종도, 언어도, 종교도, 문화도, 생활 방식도 전혀 다른 오스만 세력이 지배하는 새로운 제국이 등장했다. ----「프롤로그」중에서
술탄은 프란체스의 손에서 열쇠를 빼앗아 금고문을 열었다. 몇 개의 타일 벽이 동시에 앞으로 움직였다. 호위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금고 안으로 집중되었다. 다음 순간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가득 찼던 그들의 눈빛은 단숨에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술탄도 예상 밖이라는 듯 놀란 표정이었다. 이것이 비잔티움 제국의 현실이란 말인가. (…) 술탄은 한참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자정 무렵, 천막의 휘장을 걷고 멀리 별빛이 켜진 밤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세계 정복을 꿈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서 나 또한 황제의 일기에 답하고 그의 오판과 어리석음도 깨우쳐줄 비망록을 적겠노라. 두 제국의 지도자가 어떠한 철학과 신념으로 전쟁에 임하였는지를 후세에 가감 없이 전하겠노라.” ---「1453년 6월 1일」중에서
경이롭고 불가사의한 일이다. 하늘 아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술탄의 함대가 갈라타 언덕을 넘어 금각만 바다로 진입하였다. 최소한 해발 60미터에 이르는 그 험한 산등성이와 비탈진 언덕을 수많은 배를 끌고서 넘어갔다니!
이거야말로 기원전 5세기경 크세르크세스(Xerxex: 페르시아 제국 제4대 왕, 재위 BC 486~465년)가 험준한 아토스(Athos) 산(해발 2033미터)을 피해가기 위하여 대규모 토목 공사로 아토스 곶(岬)의 지협(地峽)에 운하를 판 뒤 함대를 이동시킨 것과 견줄 일이 아닌가.
그 많은 자재, 엄청난 장비, 그 어마어마한 인력과 동물을 어떻게 조달하고 운용하고 통제하였단 말인가. 이 모두가 불과 이틀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이 기막힌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두 눈을 버젓이 뜨고서도 말이다. 대대적인 육지 성벽 공격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팔려 대명천지에 그런 황당한 작업이 자행되고 있는 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황제의 일기」중에서
1451년, 선친의 서거로 다시 술탄이 된 내가 가장 먼저 완수하여야 할 중차대한 목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콘스탄티노플 정복이었다. 증조부인 바예지드 1세가 이루고자 한 꿈은 티무르의 훼방으로 무산되었다. 선친 무라드 2세는 전염병과 연합군의 배후 침공 가능성 때문에 부득이 회군하였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모든 것을 철저히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나 지금, 선대 술탄들의 미완성 과업인 제국의 원대한 미래와 오스만 중심의 세계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여기 콘스탄티노플 성벽 앞에서 잠 못 이루고 있는 것이다. ---「술탄의 비망록」중에서
괴물이 등장하였다. 사다리 구조를 지닌 거대한 공성용 탑이다. 후방 어딘가에서 만들어져 밤중에 소리 없이 메소테이키온 쪽 해자 부근까지 운반하여 온 모양이다. 망루를 지킨 병사들조차 전혀 눈치를 못 채었다. 여러 개의 튼튼한 바퀴들이 그 큰 몸체를 이동시키고 있었다. 해자를 메우고 그 위에 도로를 낸다면 금방이라도 성벽 앞까지 돌진하여 올 기세였다. 그야말로 움직이는 참호 겸 요새요, 병기고 겸 발사대였다. 해군 선의(船醫)인 바르바로조차 이것들이 불과 4시간 만에 만들어졌다고 떠드니 도성 시민과 군사들은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
주께서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 하셨습니다. 극복하지 못할 시련은 주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저 괴수를 무너뜨릴 지혜를 주옵소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장 13절) ----「황제의 일기」중에서
이 도시의 정복은 나에게 끝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이다. 세계 제국 건설을 위한 첫걸음이요, 시금석이다. 나 이후에도 오스만의 꿈을 이어받은 술탄들에 의해 정복 과업은 계속될 것이다.
이 도시는 두 대륙과 두 바다를 하나로 묶어 연결하는 구심점이요, 중심축이다. 나는 이 도시를 육지와 바다 가림 없이 제국의 영토를 넓혀나가기 위한 본거지로 삼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 수도이면서 세계의 수도, 종교와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도시로 새롭게 탄생시킬 것이다. 이민 장려 정책을 통하여 종교와 민족, 언어와 국적 구분 없이 양질의 인간들이 평화롭게 모여 사는 정치·경제·군사·행정·법률·교통·건축·교육·문화·예술 등 모든 분야의 핵심 도시로 만들 것이다. 그리하여 풍요롭고 활기 넘치는 도시, 지상의 천국 이스탄불로 거듭 태어나게 할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황제여,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노라. 알라와 선지자 무함마드, 꾸란과 나의 검에 걸고 맹세하겠노라. 비록 자발적인 항복으로 그대의 도시를 차지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이 도시를 발전시킬 것이다. 200여 년 전 십자군이 저지른 만행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창조를 위한 파괴를 할 뿐이다. 피폐한 이 도시를 융성시켜 각양각색 문화와 문명이 만발한 세계의 수도로 새롭게 발돋움하도록 만들 것이다. ----「술탄의 비망록」중에서
바다와 만 쪽에 있는 두 해안 성벽은 외겹(한 겹)인데 반해 육지 쪽 성벽은 해자·외성·내성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삼중 성벽이다. 이것이 천년 이상 수많은 외침을 막아온 철옹성이다. 지금은 성벽과 성문 사이로 자동차와 사람이 다니는 길이 나 있다. 560년 전, 한쪽은 이 문들을 지키기 위해 죽어갔고, 또 한쪽은 돌파하기 위해 목숨을 던졌다. 모든 문에는 저마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피어린 역사가 있다. 그리스어·라틴어로 된 명문들이 성벽과 성문의 역사를 아프게 증언한다. 문자를 모르는 길손이라도 누구나 가슴이 뭉클해진다. 두 제국의 역사가 명문보다 더 깊이 성곽 곳곳에 아로새겨져 있어 이중으로 된 성문 앞뒤 쪽을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역사 속으로 빨려들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성벽이기에 천년을 버텼는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