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알아요? 정부 공안당국에서 공식적으로 킬러를 운용하지 않는 건 한국밖에 없다는 거. 병신들이죠. 자기 거 다 뺏겨도, 뺏기는 줄도 모르고……. 만약 중국 국민들이 한국 국민들처럼 당하고 있었으면, 벌써 여러 사람 뒤통수에 구멍이 났을 거예요. 그러니 요즘 글로벌 호구라는 농담이 유행하는 거 아니겠어요? 중국과 한국의 차이는 딱 하나예요. 중국은 당하면 당하는 줄 아는데, 한국은 당해도 당하는 줄 모르죠. 위험한 은퇴자? 지랄하고 자빠진 거죠. 위험하긴 뭐가 위험해요, 비겁한 거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지환은 왠지 모를 반발심이 들었다.
‘킬러? 아니, 이 여자가 지금 제정신이야?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나 있는 걸까? 혹시 과대망상증 환자 아냐?’
블랙홀에 갇혀 있던 그의 육체가 빠져나오듯, 그의 자존심과 함께 상식적인 판단들이 다시 머릿속에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p.42
“청와대 경제특보로 오 팀장이 추천되었대요. 며칠 내로 콜 사인이 나올 거예요. 축하해요.”
오지환은 들고 있던 커피 잔을 엎을 뻔했다. 청와대 경제특보라는 자리가 있다는 것도 처음 들어본 이야기이고, 그 자리에 왜 자기가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왜 이 여자에게 들어야 하는지 짚이는 바가 전혀 없었다.
“영감님 생각이에요. 젊은 사람에게 큰일을 해볼 기회를 줘야 이 나라에 미래가 있다나 뭐라나. 진짜 고집불통 같은 양반이에요. 아, 물론 저도 추천을 했구요.”
“청와대에 경제수석은 있어도 경제특보라는 자리는 못 들어봤는데……. 그런 게 있었나요?”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지환은 꼼꼼하게 하나씩 짚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 물론 없었죠. 어제부로 만들어졌어요. 그거야 뭐 형식적인 거고. 거기 워낙 바보들만 앉아 있으니, 대통령에게 경제를 설명해줄 사람이 하나 필요하다, 뭐 그런 거죠, 그 영감 생각이.” --- p.65
“잘 알겠습니다, 의장님.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지요.”
통화를 마친 대통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회의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대통령의 입으로 모였다.
“22조 원 펀드로 공격하겠다는군. 20조 원 넘는다는 얘기가 맞구먼. 5일 준다는데…….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보라는군, 이 인간 얘기가.”
“다, 잡아들이면 되는 거 아닙니까, 각하.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얼떨떨해하던 비서실장이 특유의 다혈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뉴욕, 북경, 이런 데서 벌어지는 일을 여기서 무슨 수로 잡아들이나? 비서실장, 잠시 가만히 좀 있어. 자, 오 특보 문제는 알았네. 자네 같으면 어떻게 해결하겠나? 설마 대책도 없이 이렇게 사람들을 불러 모은 건 아니겠지?” --- pp.83-84
“이번 남북정상회담에 통일 방안을 올려보자는 거지요. 준비가 잘되면 아예 이번 정부에서 통일 작업을 마무리했으면 하는 생각이 있어요. 그래, 별 쓸 데도 없는 서류 쪼가리 읽는 것보다는, 통일 선언문 정도는 발표해야 하지 않겠나 싶고……. 김정은 장군을 통일 지도자로, 멋지지 않나요?”
순간 방에는 정적이 흘렀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이야기인지, 그 무게의 중압감에 대한민국에서 급파된 세 명 사내는 기가 질렸다.
“연방제 통일 얘기는 전에도 나왔던 거기는 하지만, 그럼 어느 쪽에서 국가원수를 맡게 되죠? 사람들이 그거부터 물어볼 텐데.”
이철현이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기딴 형식적인 얘기는 천천히 합세다. 뭐, 정 안 되면 그냥 2년씩 순번제로 해도 되고……. 오늘은 기런 얘기가 중요한 게 아니지요. 하여간, 동무들 생각은 어떻소?” --- pp.156-157
“이제 시작해보자구, 오 팀장!”
모니터에는 비밀번호 입력을 기다리는 UBS 예금 이체 화면이 떠 있었다. 오지환은 상의 안쪽에서 빨간색 밀랍으로 봉인된 금박 치장의 작지만 화려한 봉투 하나를 꺼냈다. 밀랍 봉인을 뜯자 고풍스러운 양탄지가 한 장 나왔다. 그 안에 구좌 패스워드가 펜글씨로 적혀 있었다. 오지환은 조심스럽게 패스워드를 입력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외환 오퍼레이터 시절이 잠시 떠올랐다.
“UBS 자금 50억 달러, 입금 완료되었습니다.”
“우와!”
작은 사무실이 사람들의 환호성으로 꽉 찼다. 박종태가 옆에 세워놓았던 샴페인을 터뜨렸다. 뻥 하는 소리와 함께 거품이 치솟았고, 여기저기에서 박수 소리가 터졌다.
“인민은행 30억 달러, 입금 완료되었습니다.”
“BNP 20억 달러, 입금 완료되었습니다.” --- p.214
“미쳤어, 너? 이 서류는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이야. 여기서 한 자라도 고치면 펜타곤에서 직접 명령 들어가. 이 앞에 전투기 뜨고, 불바다 되는 거 보고 싶어? 니가 뭘 안다고 자구 수정이고 지랄이야. 항공모함이 떴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기나 해? 얘 좀 봐. 겨우겨우 도망갈 구멍 만들어줬더니 말하는 것 좀 봐.”
얼얼해진 뒤통수를 매만지던 오지환이 김수진에게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그래도 읽기는 해야 할 거 아냐. 이거 사인 잘못하면 평생 북한이나 국정원 슈터들이 내 뒤를 따라다닐 거야.”
“별말 없어. 대통령 임기 중에 통일 안 하도록 청와대 경제수석이 노력한다는 내용이야. 자, 내가 먼저 사인한다. 함장님도 어서 사인하세요. 그 조건으로 이번 대통령 임기 중에는 제7함대도 제주 해군기지에 직접 기항을 시도하지 않는다, 됐어요? 이 이상 어떻게 우리가 더 양보해? 펜타곤에서 얼마나 큰 양보를 한 건지, 너님께서 알기나 하세요?” --- pp.282-283
“한전, 남동발전, 서부발전, 한전 계열사의 사무라이 본드가 10퍼센트 언더로 나왔습니다.”
“양키 본드 쪽에도 한전 계열사 쪽 본드들이 분산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5억, 10억, 이런 5천만 원짜리 소액도 있습니다. 저쪽 트레이딩 인력이 많나 봅니다. 인해전술인데요.”
“콜. 전부 받아줘.”
트레이더들의 손가락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본격적인 전투는 시작도 안 한 상태였다.
새벽 1시가 되자, 지루한 공방전이 끝나면서 거래가 뜸해졌다.
“5퍼센트 언더로 우리도 매각 주문 내.”
한참 모니터를 응시하던 박종태가 말했다.
“본드 매집이 미션 아닙니까?”
“우린 자금력이 달려. 우리 돈으로는 어차피 다 못 사. 저쪽이 매집한 본드를 소진시키는 게 1차 목표야. 자, 주문 들어갑시다. 5퍼센트 언더 매각!”
시계가 새벽 1시 30분을 가리켰다.
--- p.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