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알바가 아닌 일을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말하는 직장, 즉 정규직이 돼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회사에 소속되었던 적도 없고, 당연히 4대 보험의 혜택을 받아본 적도 없다. 개인 보험에 든 적도 없고, 적금을 들지도 않았고, 그 흔한 저축도 하지 않았다. 매년 5월이면 날아오는 종합소득세 신고서 속의 한 해 총소득 항목을 볼 때마다 어김없이 똑같은 생각이 든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거지?
그렇다고 해서 남들보다 일을 덜 했느냐면, 그건 또 그렇지 않았다. 대학교 입학 전부터 과외와 서빙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10년이 넘도록 일을 쉰 적이 없는데도 그랬다. --- p.10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날들이다. 얼마 되지도 않는 원고료를 전전긍긍 기다리며, 매달 말이면 0을 향해 치닫는 통장 잔고에 마음까지 텅 빈 채로 매달 초를 해쓱한 얼굴로 맞이한다. 이대로라면 그나마 떼먹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날들이 영원히 이어질지 모른다. 언젠가 국민연금 납입 연락이 와서 상담사와 통화를 했던 일이 생각났다. 왜 국민연금을 내야 하는지, 만 65세 이상이 되었을 때 어떤 혜택을 받게 될지 한참 설명하던 상담사는 내 한마디를 듣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아, 제가 한 달 수입이 0원일 때도 있어서요.
침묵. --- p.12
그래서 지금 원고료를 받지 못한 나는 뭘 해야 하는데요? 나에게 백만 원은 쪼개어 살면 두 달은 버틸 정도의 액수였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앞으로 밟아야 할 절차를 물었다. 일단 내용증명을 보낼 것. 그리고 그다음은 각자 알아서. 각자 알아서.
담당자는 회사 측에 나보다 열 배 이상의 돈을 떼먹힌 상황, 그러니까 사기를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알아서 원하는 길로 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전화를 끊으면서, 나는 프리랜서로 일한다는 것은 각자 알아서 생존하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누구도 내 고료를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 p.17
과연 직업이란 무엇일까. 알바와 병행하지 않고 생존이 가능할 때,
그게 직업이 되는 게 아닐까. --- p.28
시급 삼천 원, 주말에 오만 원을 겨우 버는 알바생이나
사실 아무도 듣지 않는 멘트를 하는 DJ나
가게를 가졌지만 매상에 한숨 쉬는 사장님이나
대기업에서 받은 월급으로 양주를 킵해두고
창 없는 바에서 술을 마시는 회사원 모두에게
세상은 험난한 곳이니까 말이다. --- p.84
“하루에 7.5야.”
일을 소개시켜주며 친구가 말했다. 7.5라니, 하루에 7시간 반을 일한다는 건가? 멍한 표정으로 이렇다 저렇다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 친구가 덧붙였다.
“일당 칠만 오천 원이라고.”
아……. 로딩되는 소리를 냈던 게 몇 주 전. 밸런타인데이를 불과 한 주 앞두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0.5가 얼마나 큰 차이인지 알게 됐다. 이를테면 그건, 유재석과 박명수의 차이다. --- p.90
“어머! 이 동네 사시나 봐요. 드라마 잘 봤어요.”
언론고시 준비생이자 드라마키드로서의 장점이 십분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주변에 있던 아주머니들의 귀가 쫑긋거리기 시작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연예인에게 옮겨졌고, 곧 일대가 술렁였다. 예상치 못한 관심에 당황하기도, 들뜨기도 한 그는 무려 초콜릿 다섯 통을 카트에 넣었다.
이것이야말로 아무도 예상치 못한 기승전판매 전략. 그를 둘러싸고 있던 아주머니들은 “아까 그 연예인도 샀어!”라며 초콜릿을 덥썩덥썩 집어 들었다. 그와의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창대했다. 그렇게 10시간을 넘게 서서 산처럼 쌓여있던 초콜릿을 거의 다 팔았다. --- p.95
“그래도 손님이잖아요.”
스타우트 씨가 공장에 다니든, 종로 어딘가 공사장에서 막일을 하든 그건 그냥 일이잖아요. 그리고 사람 일 모르잖아요. 사모님은 몰라도, 난 내가 앞으로 뭘 할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뭘 하고 살지 잘 모르겠는데. 그냥 일하는 사람들을 그 일 때문에 나쁘게 보거나 낮춰서 보면 그건 좀 슬프지 않을까요. 스타우트 씨가 하이네켄을 마시고 낸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를 손으로 눌러 펴면서 아까 삼킨 말을 중얼거려 보았다. 진짜, 사람 일 모르는 거니까요. --- p.108
갑자기 뜨겁고 축축한 손이 내 허벅지에 턱 닿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목을 휙 잡아챘다.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그를 노려보다가 경련이라도 난 것처럼 입술을 움직여 겨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손가락을 펴서 빼빼로 세트 손잡이를 걸어주었다.
“이거 사모님 갖다 드리세요. 좋아하실 거예요.”
찰나의 긴장.
긴장을 깨트린 것은 부장님인지 과장님인지 하는 아저씨의 껄껄대는 웃음이었다.
“이 아가씨 재밌네!”
이번에도 다시 웃어 보려고 했지만 입이 얼어서인지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 p.113~114
지금도 갑자기 라인이 빨리 돌거나 닭이 막 쏟아질 때는, 나의 첫 번째 트레이너였던 홍콩인 키키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돈 패닉, 이나. Don’t panic, Ina.
그거면 돼. 어떤 상황이 와도, 발밑의 세상이 갑자기 쫓아가기 힘든 속도로 돌아가거나 나쁜 일이 막 쏟아지더라도 돈 패닉 이나. 돈 패닉. --- p.120
맛있네.
호주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에 평소보다 닭을 더 많이 먹을 만해.
“난 이런 맛있는 걸 만들었으니 이번 주에 천 달러를 받을 만하지.”
“천 달러?”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이브. 입이 떡 벌어진 친구 앞에서 먹는 치킨버거는, 정말 메리한 맛이었다. --- p.146
공장의 신기한 점은 개인으로서의 나는 거의 쓸모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공장 일은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그 한 사람의 힘으로 뚜렷한 변화가 일어나는 유형의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일을 잘해도 라인에 설 때 한 번에 두 개의 포지션에 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공장에서는 모두 함께 일하고 있는 것만이 중요했다. 개개인이 요령을 피우지 않는 것, 같이 적당히 잘하는 것이 슈퍼맨 한 명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왔다. --- p.184~185
하지만 원고를 쓰면서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 살아있는 표정이 더 나은 페이지를 만들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지. 그래서 포토그래퍼가 보내준 사진 중에서도 정말 못나디 못나게 나온 사진들만 추렸다. 그중에서도 엄청나게 인상을 쓰며 봉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의 번호를 적어 넣고, 캡션을 달았다.
나는 틀렸어, 먼저 가.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 사진이 약하다면 얼굴이 더 일그러진 사진을 써도 좋음. --- p.200
마감일을 지키는 것. 그게 프리랜서로서 내 1원칙이고, 지난 7년 간 한 번도 그 원칙은 어긴 적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 윤이나입니다. 마감을 지키죠. 그게 내 자기소개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지구 반대편에서도 나는 마감일을 지킨다. --- p.209
종잇장만큼의 차이로 비켜가고, 골대를 맞고, 또 맞고, 페널티킥마저 안 들어가는 그런 날. 그런 날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계속 슛을 해야 한다. 슛 없이 비길 수는 있지만 이길 수는 없다. 그런 마음으로, 그러니까 안 들어가도 슛을 하듯이 안 써져도 일단 쓰자는 마음으로 또 시작한다. --- p.210
내 처지에 무척 큰돈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생각해보니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주사기는 이제 막 채워지기 시작했는데 나의 백만 원 판타지는 생계를 이어갈 고민에서 벌써 끝이 났다. 한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언제나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든다. --- p.214
“윤이나 사장님!”
장난으로 나를 치마사장이라고 부르고 있었으면서도 전자상거래 등록증을 찾으러 간 시청에서 정말 사장님이라고 부르자 화들짝 놀랐다. 평생 살면서 갑의 위치에 있어 본 적도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말단 중의 말단 알바에서부터 바득바득 기어 올라와 ‘기어코 사장’ 같은 느낌은 당연히 조금도 들지 않았고, 그저 내년 종합소득세 신고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업자등록증이 있으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하는 건 아닌지 그게 궁금할 뿐이다. --- p.220~221
프리랜서는 이런 식으로 자체적인 시너지를 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지 않으면 당장의 생계가 곤란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출퇴근의 자유를 제외하고 그 어떤 자유도 허락되지 않는 이상한 ‘상태’의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프리랜서의 삶이야말로 창조경제가 아닐 수 없다. --- p.229
윤이나를 갑으로 한다? 갑이라고요? 누구요? 저요?
최근 연재를 하거나 좀 다른 형태의 계약이 필요할 때 계약서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그야말로 최근의 일이었을 뿐. 꽤 오랫동안 계약 없는 노동에 종사해왔던 나에게 이는 너무나 낯선 관계였다. 대부분 일을 주는 사람들은 구두로 계약을 했다. 그뿐 아니라 액수가 많은지 적은지를 가늠할 수도 없는 그나마 몇 안 되는 근로 계약 속에서도 나는 당연히 을이었다. 마감 노동자로, 그러니까 알바로 연명하는 한 앞으로도 그러리라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 계약서는 좋기에 앞서 일단 낯설었다. 몇 번이나 다시 읽어봐야 할 만큼. --- p.241
저는 오늘 마감을 했습니다. 언젠가 내가 쓴 글이 무엇인가가 될 수도 있겠죠. 백사십만 원의 빚을 지고 떠난 호주에서 쓴 글들이 한 권의 책이 된 것처럼. 그러니까 저는 오늘의 제가 내일 무엇이 될지는 모르는 채로, 또 살아보려고 해요. 무엇이 되고 싶지는 않고, 무엇이든 되고 싶어요. 놀고 있어도 그러려니 하세요.
--- p.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