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꽃향기를 실어왔다. 아직 꽃이 필 때가 아니거늘,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은은한 온기는 기어이 이른 꽃 한 송이를 피워내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자명은 꽃향기를 즐기지 못하였다. 바로 눈앞에 혜운 소저가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이 있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자명이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파파의 죽음과 은자(隱者) 혜공 성승의 입적(入寂)으로 인한 슬픔을 추스르지 못하였거늘, 소림사를 벗어나자마자 이렇듯 말괄량이 아가씨를 만나고 말았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화하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듣고 있나요, 화공?" 혜운이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자명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예. 말씀하십시오, 소저." "있잖아요, 화공." 평소의 쾌활하던 모습과 달리, 혜운의 얼굴에는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말을 맺을 때 즈음에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저는 화공께서 약속을 지켜주시기를 바라요." "약속이라니요?" "예전에 제게 그림을 그려주기로 하셨잖아요." "아아, 그랬었지요." 혜운의 말에 자명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