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마주 보며 느끼는 서로에 대한 존재성, 그건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훼손되지 않을 신뢰이다. 눈맞춤은 그렇게 교육의 오랜 결과물, 즉 존재성에 대한 신뢰로 다가왔다. 아마도 그때, 우리가 교사와 학생이었던 시절도 그렇게 눈맞춤 하는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p.18
타인의 눈에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교사와 아이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남을 모르니 자신도 모르고 자신을 모르니 남도 모른다. 남을 알려면 남의 마음을 읽어야 하고 남의 마음을 읽으려면 남의 눈을 깊이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하는데, 요즘 아이들은 남의 눈을 들여다보며 눈맞춤 하는 일을 몹시 어렵고 힘들어한다. 내 말만 쏟아놓고 내 감정만 폭발하는 관계에서 눈맞춤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p.22
눈맞춤이 시작이다. 다시 교사와 학생이, 마음으로 교감하는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시작, 서로의 눈맞춤으로 서로의 관계성을 키워갈 수 있는 교육을 지금 바로 시작해야 한다. ---p.23
그때는 체벌이 교사의 권위로 행사되던 시대, 선생님들은 무서운 회초리들을 누구나 들고 다녔다. 나는 아이들을 야단쳐야 할 일이 생기면 모두 꿇어 앉히고 ‘어머님 은혜’ 노래를 부르게 했다. 부르라고 부르던 아이들도 예뻤지만,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한 소절 채 못 부르고 울음보가 터지고, 엉엉 통곡에 섞여 부르던 노래는 반성에 반성, 그 자체로 아이들을 천사처럼 어루만졌다. 그 아이들이 이제 제 자식을 낳고 제 나이만큼 키웠을 텐데, 엄마와 아빠로 자라 어떻게 제 자식들을 키우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pp.26-27
대한민국 교육의 질은 등수로 결정한다. 꿈이 뭐고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세계관과 취향을 아무리 설명해도 감을 잡을 수 없지만, ‘몇 등’ 이것만 말하면 누구든 학업 수준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오직 등수로만 결정하고 파악하는 공부. 그래서 등수는 점점 더 섬세하게 세분되어 2등급에서 5등급에서 9등급으로 다시 표준점수로 환산되고 백분율에 소수점 이하까지 계산한다. 등수를 매기기 쉽게 하려고 시험이 남발되고, 시험 형식 또한 선다형 객관식으로 거듭거듭 교과서와 교육과정 밖으로 심화되며, 시험 단위도 학급에서 학교, 지역을 넘어 전국 단위로 커지다 못해 단일화(일제고사)시키고 있다.
결국, 학급 등수에서 전국 등수까지 치밀하게 세분화된 성적표를 매회 확인하는 것이 공부인 셈이다. 공부를 어떻게 했나 그 결과를 판단해 보기 위해 시험을 치는 게 아니라, 시험을 잘 치기 위해 시험을 대비해서 문제 풀이에 전념하는 것이 ‘공부’인 것이다. 시험 치는 날이면 아파트가 조용해지고 지역 음식점이 한산해지는 진풍경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다. 아이들도 시험이 없으면 놀게 된다고 당연하게 말한다. ---pp.96-97
왜 이렇게 되었을까? 1~2명 낳아 풍족하게 온갖 정성 다 바쳐서 키우는데 아이들은 비뚤어지고 병들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등수를 중심으로 하는 이 무한 경쟁 세상은 자연스럽게 변화해 온 세상일까? 온 세계가 다 이렇게 공부하는 것일까? 아니다. 바로 우리나라 정부가 교육정책으로 ‘무한경쟁’과 ‘배타적 차별’을 교육의 중심 테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국가 경쟁력을 높이자고 외치면서 국가 GDP를 올리고 기업을 살리는데 ‘교육’이 ‘시장’이 되어야 한다고 정책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교육은 사람을 키워내는 의미 있고 귀한 영역인데, 돈벌이하는 치부 수단으로 전락하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지점에 분노하고 저항한다. ---p.99
서열은 학생들만 줄 세우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의 모든 학교와 교사와 학부모들도 다 줄 세운다. 서열은 ‘선착순의 복종’을 전 시민의 마음속에 뿌리내리는 기재가 된다. 오직 등수만이 인간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고, 서열로 빚어진 인간관계는 오직 명령과 복종의 양극단을 만들어 갈 뿐이다. 패배자는 열등자가 되고, 열등자는 다시 낙오자가 되어 잉여인간으로 전락하고, 우승자는 부와 명예와 권력을 독점하면서 현대판 새로운 귀족들로 재탄생하고 있다. ---p.103
젊은이들의 키워드가 ‘꿈,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라니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장밋빛 환상을 심어주는 것은 교육이 아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라 닦달하는 것도 교육이 아니다. 교육을 통해 돈을 쓰고 돈을 벌도록 부추겨온 것이 교육정책일 수도 없다. ---p.121
가능할까? 많은 사람이 이렇게 회의한다. 보수의 물결을 너무 강하고, 경쟁력 중심의 시장화 전략은 너무 압도적이며, 돈 이익 승리 성공 따위 신화는 너무 대세고, 10대 90의 사회를 넘어 1% 대 99%의 사회라 너무 절망스러우며, 이런 세상이 너무 당연해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헛꿈 꾸는 건 아닐까? 때론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옳다’고 판단한 길을 가하려는 것이 ‘운동’이다. 교육을 존재 근거로 하기에 ‘교육운동’의 길을 가며, 노동자가 존재 조건이기에 ‘교육노동운동’의 길을 간다. 우리가 가는 참교육의 길은 끝이 없다. 지금 외치는 것이 이뤄지면 또다시 상향된 개혁의 길을 찾아 가야 하는 길이다. 교육은 영원히 상승하는 가치이다. 그래서 죽음이 올 때까지 그 길을 갈 것이며 우리가 죽은 후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그 길을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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