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위로부터의 역사’뿐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역사’
대한제국 시기의 대표적인 반봉건, 반침략항쟁은 활빈당 투쟁이었다. 활빈당이라는 이름은 홍길동전에서 따온 것으로 ‘가난한 사람을 살려내는 무리’라는 뜻을 지닌 의적義賊이었으나 벼슬아치와 같은 양반지배층이나 지주들이 보기에는 도적 떼에 지나지 않았다.
농민들은 청일전쟁 뒤 지주제가 강화되면서 토지에서 유리되자, 19세기 중반부터 늘어난 화적당과 결합하여 전국 규모의 활빈당으로 발전했다. 활빈당의 내부 규율은 엄격했으며 십여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비밀 무장결사체였다. 이들은 1900년을 전후로 충청, 경기도,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 소백산맥 부근의 전라도 등를 중심으로 독자 활동을 하면서 서로 연계하여 활동했다. 이들 활빈당은 “우리들은 나라에서 능히 잡을 수 없고 부, 군 등 지방관청에서 막을 수 없다”고 장담할 만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다. (근대2강)
2. 객관적 서술을 통한 역사의 진실 바로 보기
세계대전 뒤에 새로운 사조로 나타난 ‘민족자결’은 나라 안팎의 우리 민족에게 반일 독립운동을 크게 고무시켰다. 특히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세계개조의 신시대’로 받아들여 세계열강의 도움을 빌어 독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전승국인 일본의 식민지인 우리 민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이같은 사실은 일본인 취소관과 민족대표 사이의 심문 내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취조관 : “지금 민족자결은 구주 전란 결과 주권을 상실한 나라의 민족이나 직접 전란에 참가한 구주 내의 일부분의 민족에 대한 문제이므로 조선과 같은 것은 그 범위 밖의 일로 알고 있는데…….”
한용운 : “민족자결이라는 것이 그런 구역을 정했는지는 모르나 전 세계적으로 병합한 나라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조선도 그 운동을 하면 독립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나라 안팎의 민족주의자나 지식인들에게 강대국의 도움을 받아 곧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주었고 3.1 운동을 촉발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근대3강)
셋째, 자료와 함께 보는 재미있는 역사
겉모양에만 치중했던 경제성장의 허상은 1970년 4월 마포 와우시민 아파트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 사건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경제가 양적으로 성장했는데도 소득은 골고루 분배되지 않았고 사회지도층의 부패는 심각해져 갔다. 이에 대해 시인 김지하는 '오적(五賊)'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것다.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떼이부어 남산만하고 목질기기 동탁배꼽 같은
천하 흉폭 오적의 소굴이렸다.
첫째도둑 나온다. 재벌이란 놈 나온다.
돈으로 옷해 입고 돈으로 모재해 쓰고 돈으로 구두해 신고 돈으로 장갑해 끼고 금시계, 금반지, 금팔찌, 금단추, 금넥타이핀, 금카후스보던, 금박클, 금니빨, 금손톱, 금발톱, 금 작크, 금시계줄, 디룩디룩 방대이, 불룩불룩 아랫배, 방귀를 뿅뿅뀌며 아그작 아그작 나온다
국회의원 나온다.
혁명이닷, 구악(舊惡)은 신악(新惡e)으로! 개조닷, 부정축재는 축재부정으로!
근대화닷, 부정선거는 선거부정으로! 중농이닷, 빈농은 이농으로!
건설이닷, 모든 집은 와우식으로! 사회정화닷, 정인숙을, 정인숙을 철두철미
본받아랏!
넷째, 생생한 역사의 현장
1980년 5월 21일 아침 10시 무렵 일부 시위대가 아세아자동차공장에서 가져온 장갑차를 앞세우고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와 대치하며 연좌농성을 벌였다. 또다른 일부 시위대는 전국 곳곳에 광주 소식을 알리고 동참을 호소하려고 주변 지역으로 빠져 나갔다. 이 날 시위군중은 시민대표를 뽑아 도지사와 협상하려 했지만, 신군부는 오후 1시 정각 공수부대의 일제 사격으로 이에 대답했다. 오히려 신군부는 계엄사령관의 이름으로 ‘광주 일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적 사태’는 ‘불순분자와 간첩들의 파괴 방화 선동’ 때문이라고 진상을 왜곡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현대4강)
다섯째, 한민족 북한의 오늘날
핵문제에서 비롯된 북미 갈등은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합의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소되었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더욱 얼어붙었고 북미협상 과정에서 김영삼 정권은 철저히 소외되었다. 북한 핵문제는 1994년 봄 미국에서 ‘북한 폭격론’이 제기될 만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반도를 전쟁 일보 직전까지 내몰았지만, 김영삼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또 북미 제네바합의 과정에서 구경만 해야 했던 김영삼 정권은 대북경수로를 지원할 목적으로 설립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서 돈만 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즉 이것은 한반도 문제를 주도하려는 미국의 의도와 북미관계에서 남한당국을 배제하려는 북한의 ‘통미봉남정책’(通美封南政策)이 일시 맞아떨어진 결과이기도 했다.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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