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화장법
-- 최세라 (rasse@yes24.com)
쉼없이 떠들어대는 대화체를 싫어한다면 그녀의 소설을 읽는건 상당한 고문이다. 더구나 상상 청력까지 풍부해 프랑스풍 앵앵거리는 코소리로 말허리 자르고, 잘리고 하면서도 끝까지 주절거리는 소리를 듣는다면, 반전이 매력이라는 특유의 결말까지 다다르기란 보통 일은 아니다. 등장인물을 빌려 할 말부터 안할 말까지 퍼부어 버리는 그녀의 수다는 대놓고 풀어내기에는 머쓱한 부끄러움의 변형은 아닐까 돌려 생각해본다.
아멜리 노통의 25세 첫 데뷔작 『살인자의 건강법』(1992)부터 이보다 일찍 번역되어 주목을 받았던 2001년작『적의 화장법』까지 근 10여년의 세월의 흐름에도 그녀는 여전히 탄력적인 보이스를 유지하고 있다. 폐부를 바로 찔러 들어가는 도입, 스피디하고 거침없는 논쟁, 급격한 반전과 결말이 더욱 섬세해 진다는 것은, 아무것도 모를 나이라고 여겨지는 25세에 이미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글쓰기에 뛰어들었음을 의미한다. 그녀의 전지구적 상상력과 촌철살인적 대화법은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 베이징, 뉴욕, 방글라데시, 보르네오, 라오스 등지에서 보낸 화려한 유년시절에서 출발된 듯 하다. 특히 문헌을 통한 언어학을 전공한 그녀에게 가장 자신있는 선택 또한 속전속결 대화체이지 않았을까 한다. 어쨌든 톡쏘는 '노통 스타일'은 등단 이후 프랑스 문학계와 상업계를 쥐락펴락한다는 소식을 곧잘 듣게 했다.
유명한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문학계의 거인이라 여겨지는 프레텍스타 타슈는 연골 조직에 이상이 생기는 희귀병으로 남은 인생이 두 달여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의 사망 예정 소식이 알려지면서 곳곳의 기자들이 인터뷰를 위해 찾아온다. 그의 괴팍하고 날카로운 성격, 주저하지 않는 폭언과 비난에 이미 4명의 기자들이 줄행랑을 쳤고, 이제 마지막 5번째로 찾아 온 당돌한 여기자로 인해 그의 비대하고 내밀한 살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다.
그는 피터팬 증후군을 겪고 있는 살인자. 부모를 일찍 잃고 한 몸처럼 같이 지낸 사촌여동생과 풍족한 유년기를 보내면서 영원한 사랑과 행복을 위해 어른이 되지 않기로 결심한다. 목숨 보존을 위한 최소한의 식사, 수면 시간의 단축, 외부와의 철저한 차단 등의 가학적 노력도 불구하고 흐르는 시간과 자라나는 몸을 세울 수는 없는 법. 호수에서 단 둘이 수영하던 어느 날 새벽, 여자아이의 초경을 본 그는 그녀를 목졸라 살해하고, 그녀를 잃은 상실감과 두려움으로 집에 불을 질러 친척 모두를 죽인다. 이제 그의 나이 83살. 68년이 지나서야 한 여기자에 의해 한 가문을 몰락시킨 살인자의 정체와 이를 내용으로 한 자전적 미완성 소설『살인자의 건강법』의 결말이 밝혀진다.
<소화불량 옹호론><실수 연발 학살><동시 발생적 은총> 등 소설 속 소설가가 쓴 소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멜리 노통은 단어 조합에 천부적이다. 그녀의 실제 소설 제목도 그렇듯이 제목만으로도 그녀의 얼굴이 된다. 여기에 충부한 철학적, 문헌적 틀에서 직조된 지식의 원단 - 수많은 실존 작가들의 작품 성향, 손, 성기, 이름 등에 대한 철학적 고찰 등- 들이 파격적인 스토리 라인과 눈에 띄는 장식들 - 단어, 유머, 독설 등 - 로 재단되어 한 벌의 튀는 작품을 만들어 낸다. 이런 '노통 스타일'은 분명한 장점이자 곧 단점이 되는데, 일단은 독특한 취향을 즐길만큼 그녀와 코드가 맞아야하고, 거기에 쉽게 질리지 않을만한 무던함도 갖추고 있어야 1년에 한 번씩 오래도록 그녀를 만날 수 있다. 물론 만반의 준비가 된 독자에게는 확실한 즐거움을 보장해 준다.
하나 더,『살인자의 건강법』을 읽다보면 번역서에서 보기드문 몇가지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흥미롭다. '께느른한(일에 마음이 내키지 않고 몸이 느른하다)' '지청구(꾸지람. 아무 까닭 없이 남을 탓하고 원망함)' '톺아보다(샅샅이 뒤지고 찾아 나가면서 살피다)' 등등 한번 쯤 들어는 봤으되 자주 쓰이지는 않는 단어들이 한층 맛깔스럽게 한다. 탐스러운 문장은 많이 봤어도, 독특한 단어들을 사용한 번역은 드물었기에 김민정의 솜씨가 더욱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