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고 화내고 질투하고 투정부리는 작가들
--- 99/12/01 이희인(heen@ktcf.co.kr)
신문학의 비조 자리를 빼앗긴 원통함을 감추고 춘원을 향해 독설을 퍼붓고 있는 김동인을 생각해 보라. 그 독설에 아랑곳없이 묵묵히 책장을 넘기고 있을 무뚝뚝한 춘원을 상상해 보라. 그렇듯 갈 길 바쁜 동인의 덜미를 잡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염상섭을 생각해 보라. 카프의 정신적 지주 박영희 집에 기숙하며 내오는 밥그릇에 담배 재를 털고 있을 임화라든가, 해가 뉘엿 넘어가는 늦은 오후 일어나 제비다방 간판 아래 꽁초담배를 태우고 있을 이상한 이상 등을 그려 보라.
때론 당당하게 암울한 시대에 맞서고, 때론 섬약한 모습으로 불의에 타협했던 우리 문인들의 발자취를 살피는 일은 근대 정신사의 살내음을 맡아보는 일에 다름아니다. 지난 백여 년의 민족사가 지식인의 존재에 끊임없이 물음을 던진 과정이었던 만큼, 이 땅에 작가로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실존적인 강박에 시달린 고단한 살이였음에 분명하다.
한국문학의 오랜 화두인 '문학사'가 아니라, 생소하고 낯선 '문단사'의 이름을 들고 나온 <한국문단이면사>는 우리 근대문학의 구비구비를 헤집고 있다. 멀리는 창조, 백조, 개벽까지를, 가까이는 해방 직후나 전후 피폐한 문단까지 두루두루 살피고 있다. 본격 문학의 한가운데는 물론이려니와, 아동문학, 종군작가단,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한 동인활동까지 아우르고 있어 그 시야가 자못 광범위하다.
수록된 글들 또한 딱딱한 비평문이나 본격적인 연구서가 아니라 개인 회고담 형식을 빈 문단 야사의 성격을 띄고 있어 (이 분야에 일말의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에게 어려움 없이 읽힐 만하다. 이광수로부터 창조, 폐허를 아우르는 김동인 주요한의 글이나,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다룬 김팔봉 이기영의 글, 해방 직후 문단을 그린 안함광의 글 등은 물론, 개개 문단활동에서 그 중심에 위치한 문인들에 의해 쓰여진 글들은 개인의 회고담일지라도 일정한 대표성을 아울러 포함하고 있다.
물론 저자들의 편견과 일정한 의도가 작용했을 글들을 문맥 그대로 읽는 것은 분명 오독으로 흐르기 쉽다. 이광수와 동등한 반열에 자신을 위치 지으려는 김동인의 내면을 읽는다든가, 일제 암흑기 문단을 그리는 가운데 자신의 친일 경력을 얼마간 변명코자 하는 김팔봉의 속내를 짐작하는 것이 어쩌면 이 글들을 읽어나가는 진정한 재미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엮음은 엄연한 한계를 또한 내포하고 있다. 방대한 근대 문학의 자료 가운데 여기 묶인 자료들은 매우 작은 부분에 불과함은 물론이다. 24편 글 중 17편이 동일한 출전(<文壇交遊記> 대한일보 1969.4.7∼1970.12.10) 이라는 사실은 '문단사'라는 거창한 이름에 값할 만큼 성실한 엮음이었는지 되묻게 한다. '문단사'라는 거창한 명명에도 불구하고 일차적인 자료들을 취합해 놓은 데 불과하여 차라리 '문단사 자료집' 정도라 해야 옳을 것 같다.
김동인, 조연현, 백철 등에 의한 사조-동인지 중심의 문학사를 비판하고 있지만 이 책 역시 그러한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도 없다. 본격 문학사 서술에 도외시되어 온 아동문학이나, 색동회, 만주 문단, 명동 문단 등을 다루었다 하여 한국 문단을 두루 살폈다 할 수도 없다. 그 성긴 틈 사이로 우리 문학의 보배 같은 작가들의 빈자리가 여전히 느껴진다.
무엇보다 책의 의도가 모호한 느낌인데 일반독자에게 친근하게 읽힐 문단 뒷이야기에 책의 편집 의도가 맞추어져 있는지, 혹은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을 위한 본격적인 자료집으로 기획되었는지 모르겠다. 전자를 목표했다면 이토록 광범위한 조망이 불필요했을 터이고 좀 더 친근한 자료들이 더 많았을 듯하다. 후자를 목표로 했다면 관점과 의미망의 부재가 커다란 흠이 될 것이다.
어쨌거나 이 글들 속에는 문학사를 암기의 대상으로 격하시킨 제도 교육의 책장에서는 맡지 못할 작가들의 살내음이 폴폴 피어오르고 있다. 무슨 작품, 무슨 활동을 한 어떤 작가의 평면적 사실이 아닌, 웃고 화내고 질투하고 투정부리는 살아 숨쉬는 우리 작가들을 행간마다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