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자기반성은 ‘새로운 정치’의 ‘새로운 한국정치론’, 좀더 정확히 표현해 새로운 주제와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는 ‘한국정치론의 재구조화’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이 재구조화의 방향을 제시한다. ‘근대성’ 속에서 억압돼온 성과 지식 등 (‘적대’가 아닌) ‘차이’의 문제에 대해 주목하는 ‘차이의 정치’, ‘정체성의 정치’, 특히 한국의 ‘성의 정치’ 등 새로운 정치를 이론화해야 한다. 나아가 대학 운영에 학생과 교직원이 참여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대운협의 요구 등 ‘대학의 정치’, ‘가정의 정치’ 등 다양한 일상성 속에 내장된 한국 사회의 ‘미시 권력의 일상성의 정치’ 역시 중요한 영역으로 다뤄져야 하며, 한국 환경정치 등 새로운 사회적 의제를 이론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 나아가 한국적 상황에서 미시 권력과 거대 권력의 접합양식, 생산관계의 ‘적대의 정치’와 비생산관계적 사회적 관계의 ‘차이의 정치’를 잇는 접합양식에 대한 구체적인 탐구가 시급하다. --- p.37~38
국가-시민사회론은 그 나름의 분석적 힘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적인 계급 분석, 특히 국가(마르크스주의적 의미의)-민중 모델을 대치하는 새로운 ‘대안적 모델’이 아니라, 이것을 보완하는 ‘보완적 모델’로 활용돼야 할 따름이다. 국가-시민사회의 관계는 사회적 영역, 즉 계급투쟁의 구체적인 지형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일 뿐이지 국가와 시민사회가 계급을 대체해 역사의 주체로서 서로 싸우고 대립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 ‘국가=억압, 시민사회=민주주의’라는 도식 아래 양자를 분석 단위로 해서 한국정치를 이해하려는 것은 민주주의의 또 다른 문제, 어쩌면 민주주의의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은 시민사회 자체의 문제, 즉 시민사회 내의 계급적 갈등의 문제, 특히 자본의 억압 문제다. --- p.161
마르크스의 정식이 맞는다면 박근혜를 무너뜨린 11월촛불혁명은 희극으로 끝나게 돼 있다. 그러나 이번 촛불혁명은 희극으로 끝나서도, 4·19학생혁명, 부마항쟁, 6월항쟁처럼 비극으로 끝나서도 안 된다. 11월시민혁명을 성공한 혁명으로 만들어야 한다. 11월시민혁명은 다행스럽게도 일단 6월항쟁하고 다르게 ‘민주 정부’의 수립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4·19학생혁명도 ‘민주 정부’ 수립까지는 성공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번 촛불혁명도 마찬가지다. 이번 촛불혁명의 진정한 성패는 지금부터 다가올 시간에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촛불을, 최소한 가슴속의 촛불을 끌 수가 없다. --- p.330
현실적으로 반MB 투쟁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해서 08년 체제의 수준을 무매개적으로 격상시켜 97년 체제를 대체한 것이라고 이론을 꿰어 맞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필자의 이런 생각, 그리고 08년 체제는 97년 체제의 대체가 아니라 하위 체제라는 필자의 08년 체제론이 ‘이론주의’라면, 필자는 이 ‘이론주의’라는 주홍 글씨를 기꺼이 감수하고 나갈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은 87년 체제를 붙잡고 있는 ‘87년-97년 관계론’이 아니다. 오히려 반신자유주의와 반MB를 복합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97년-08년 복합체제론’(08년은 하위 체제라는 점에서 대문자 97년에 소문자 08년으로 표기된)이다. 이제 87년 체제에는 거기에 합당한 장례식을 치르고 우리의 현재에 맞서 싸우자. --- p. 406
필요한 것은 반공주의와 지역주의의 극복이다. 어떤 정책이 그 합리성에 관계없이 전근대적인 지역주의에 의해 지지되고 반대되는 한, 그리고 낡고 맹목적인 반공주의에 의해 재단되는 한, 합리적 대화와 논쟁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지역주의와 반공주의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는 점에서 이런 노력 이외에도 좀더 직접적인 요인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대중 정부는 햇볕정책이 단기적 성과와 정권의 필요성에 따라 추진될 때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따라서 앞으로는 중장기적인 긴 호흡의 시각에서 정파성과 업적주의의 유혹을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과 노력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혼자 열 걸음’보다 ‘함께 한 걸음’이라는 자세가 필요하다.
--- p.4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