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얘기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나도 마흔아홉 살인데, 때로 자신이 노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산다는 것에 흥미가 없어지고, 체력과 기력이 떨어지는데도 아무런 위기 감을 느끼지 못한다.
평균수명이 될 때까지 산다고 치면, 나와 미에코에게는 아직 지겹도록 긴 인생이 남아 있는데. --- p.23
지금 돌아가면 또 한탄과 회한의 날들이 시작될 것이다.
오늘로 끝내고 싶었다.
스즈네를 위해서기보다 자신들을 위해서였다. 우리는 늘 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슬픔을 어느 시점에서는 과감하게 떨쳐내야 한다.
나와 미에코에게도 성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 p.44
그녀의 가치관은 언제나 좋다 나쁘다로 표현되었지 그 중간은 없었다.
엄마에게 ‘싫다’는 불합격 딱지를 받고 싶지 않아, 나와 언니는 늘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그 경주에서 늘 언니가 앞섰다. --- p.68~69
엄마가 내 팔을 잡는다.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요시다 씨라는 요양사에게 늘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리 라. 홀로 남아 나이를 먹고, 병에 걸려서야 겨우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상대를 찾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전의 고슴도치처럼 줄곧 주위를 경계했던 인생에는 끝내 그런 상대가 없었다. --- p.94
가게 주인이 뜨거운 수건 위로 두피를 꾹꾹 누른다. 뜨겁 다. 아 뜨거, 하는 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올 뻔했다.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다. 그랬지, 모공 하나하나에 파고드는 이 뜨거운 수건의 열기가 이발소의 참맛이었다.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그리운 감촉이다.
뜨거운 수건에서 희미하게 토닉 향이 났다. 이 냄새도 정말 오랜만이다. 어른의 냄새다. 어린 시절에는 이발소에 갈 때마다 자신이 모르는 낯선 세계의 실마리라도 되는 것처럼 맡았던 냄새다. 어른이 된 남자의 냄새. --- p.101
많은 사람을 만나고, 갖가지 다양한 얘기를 들으면서 인격을 갈고닦은 것처럼 말씀드렸지만, 사실은 조금도 갈고닦지 못했어요. 이용 의자가 아니라, 자신이 앉을 의자가 필요 해서 예술가인 척했던 철부지 시절에서 조금도 변한 게 없었던 것이죠.
아마 제가 모든 것을 거울 너머로 보지 않았나 싶습니다.
똑바로 마주하면 괴로우니까 말이죠. --- p.133
부탁이다, 제발 무사히 있기를. 팔꿈치까지 들어가자 손에 닿는 것이 있었다. 접착테이프의 내구성을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서랍 밑바닥에 열쇠를 붙여놓았었다. 제일 위 칸, 열쇠구멍이 있는 서랍의 열쇠다.
열쇠를 밀어 넣고 서랍을 열자, 그리움과 곰팡내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안에는 편지 뭉치. --- p.166
영어로 하면 평소에 별거 아니게 보이던 것도 달라 보인 다. 영어는 마법의 주문이다. 더러워서 다들 꺼리는 쥐도 꿈속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엄마는 마미.
마미는, 벗은 운동화는 가지런히 놓아라, 방에서 큰 소리로 떠들지 마라, 표고버섯도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 그런 잔소리는 안 할 것이다. 호호호, 표고버섯 같은 이상한 건 먹으면 안 되지. 자, 애플파이를 먹으렴. --- p.195
“얘야, 이거 네가 받아주련?”
휴대전화를 시계 대신으로 사용하는 아들이나 딸과 달리, 나는 외출할 때 손목시계를 차지 않으면 불안한 세대다. 그러나 그런 내게도 아버지 시계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골동품으로 보였다. 바늘이 아예 움직이지를 않는다. --- p.241
평범한 회사의 경리과장으로 지내는 인생에 만족하지 못했던 아버지 마음을 내 손바닥 보듯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었다. 아들로서. 같은 남자로서.
그러나 이제 얘기를 들을 기회는 없다. 살아 있다 해도 당신 얘기는 하기 싫어하는 아버지였으니,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 p.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