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까지 역사를 놓고 왕조 중심, 곧 지배세력 중심으로 보느냐, 아니면 피지배세력 중심으로 보느냐 하는 이야기를 주로 해왔다. 해답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많은 지식인들이 왕조 중심으로 역사를 보는 사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루이 16세와 그의 왕비를 단두대에 올린 사건을 보더라도 왕조 중심의 사관이 지닌 한계는 뚜렷하다. 왜 절대군주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는지 그 사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지배세력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꼭 정답일까?
p.39-40
흔히 우리는 어떤 사람을 경멸할 때 ‘속물’이라고 손가락질한다. 누가 누군가를 ‘속물’이라 부르기란 무례하고 나아가 방자한 일이다. 그런데 영어 문화권에서 속물주의를 뜻하는 필리스티니즘philistinism은 ‘현실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생각하고 순응해가는 삶의 태도’로 쓰인다.
p. 43
영국의 BBC 방송이 1999년 9월 한 달 동안 전 세계 시청자들을 상대로 지난 1,000년간 가장 위대한 사상가를 묻는 인터넷 조사를 실시한 결과 카를 마르크스가 1위로 선정됐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2위로 선정됐으며, 아이작 뉴턴, 찰스 다윈 순이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10위였다. BBC는 20세기 들어 공산주의 독재정권이 마르크스의 독창적인 사상을 훼손시켰지만 철학자, 사회과학자, 역사학자, 혁명가로서 그의 업적은 현재까지도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정당하게 평가했다.
p. 47-48
우리는 왜 2,000년의 역사를 지니고도 지금 이렇게밖에 못 살까 하는 문제에 주목하고자 할 따름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 이를테면 복지가 가장 잘 실현되어 있다는 스웨덴의 역사도 우리와 견주면 상당히 짧다.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우리에 비해 역사가 짧다. 그런데 왜일까. 우리의 역사는 왜 식민지를 거쳤을까? 우리가 문명을 전해준 일본은 러시아나 중국과 싸워서 이기는 정도의 실력을 갖춘 나라로 커나갔는데, 왜 우리는 그 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했을까?
p. 51-52
링컨은 민주 정부를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로 정의했다. 이를 대한민국에서는 오랫동안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로 옮겨왔지만, 기실 이 번역은 옳지 못하다. ‘people’은 결코 ‘국민’으로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기초가 특정 국가의 틀에 갇힌 국민이 아니라 보편적인 민중people에 있다는 사실은 가볍게 지나쳐서는 안 될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민중은 국민과 달리 자신들의 뜻에 따라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국가까지 꿈꿀 권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p. 158
흔히 하버마스의 공론장을 ‘사적 영역과 구별되는 영역’으로 정의하고, 공론장이라는 말 자체가 그런 추정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그것은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에 대한 중대한 오독이다. 하버마스의 공론장을 사적 영역과 다른 영역으로 파악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일부 사회과학자의 연구에서 한국에는 ‘유교 공론장’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식의 개념 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한국에서 공론장 개념의 엄밀한 이해를 전제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p. 200
여론의 전사pre-history를 들춰보면 근대사회에서 여론의 의미는 한결 뚜렷하게 드러난다. 영어와 프랑스어에서 ‘opinion’은 라틴어 ‘opinio’, 곧 사견 또는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불확실한 판단’이라는 뜻을 이어받았다. 플라톤이 말한 ‘억견doxa’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오면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타나듯이 opinion은 평판이나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한 존경’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public opinion의 ‘opinion’이 그리스어 doxa에서 비롯된 사실은 시사적이고 중요하다. 억측으로 폄하되어온 doxa는 말 그대로 ‘불충분한 판단과 지식에 근거한 사람들의 집단적 정서나 편견’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말이 근대에 들어와 public과 결합하면서 ‘보편성’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p. 204
니체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을 ‘표준화’한다는 점에 분노한다. 그와 대립시켜 제시하는 보기가 그리스 사회다. 고대 그리스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자신의 특성을 부각시키고자 했고 독특한 행위와 업적을 통해 자신이 최고임을 보여”주었다는 게 니체의 분석이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독특한 개성이나 행위를 ‘일탈’로 규정함으로써 순응주의 사회를 조장한다. 순응주의 사회는 니체에게 ‘정치의 쇠퇴 형식’이다. ‘정치의 소멸’이다.
p. 229
“철학자들이 종래 생각해온 개인, 곧 ‘단일인’이라는 것은 하나의 오류이고, 개인은 개별의 실체, 하나의 원자, 사슬 안의 고리, 그냥 과거로부터 내려온 존재가 아니며, 개인은 그에게까지 이르는, 그를 포함한 ‘사람’이라는 하나의 연속적 전체를 이룬다”.
마르크스가 인간의 본질을 사회적 관계들의 결합체(앙상블)로 인식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니체는 또 자유주의자들이 그들이 만든 법률 속에 담긴 폭력, 냉혹함과 이기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p. 230
하지만 엄밀히 말해 우리 경제생활의 풍경을 틀 지우고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것, 바로 그것이 정치 아닌가. 흔히 “정치가 밥 먹여주느냐”라든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면서 가장 실질적이고 중요한 영역을 ‘경제’라고 꼽지만, 그것 또한 누군가의 노림수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하려는 이데올로기다. 누군가에 의해 가려진 진실을 우리가 주목한다면, 정치생활이 곧 경제생활이라는 명제를 확신할 수 있다.
p. 241
민중이 자신의 창조력, 슬기를 주권혁명으로 결집해낼 수 있을 때, ‘민주경제’로 출발해 ‘통일경제’와 ‘동북아 지역 공동체’로 외연을 확장해간다면, 한국의 새로운 경제, 새로운 정치, 새로운 민주주의는 상생과 협력의 ‘동아시아 공동체’를 넘어 궁극적으로 새로운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를 놓을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 다리를 ‘한국혁명’이라 부를 수 있다.
p. 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