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경 형 조지 그로스미스는 지역 기관과 문학계에 희극 피아노 소극 연예인으로 입지를 굳힌다. 그 해 단막 희가극 <배심(陪審) 재판>을 공연하다가 아서 설리번과 W. S. 길버트의 눈에 띈다. 조지 그로스미스의 연기에 감명 받은 그들은 자신들의 전편 오페라 <주술사>에 조지를 희극 역으로 참여시킨다. 그때부터 1889년 <예멘 근위대>가 막을 내릴 때까지 조지 그로스미스는 길버트 설리번의 장수 희극 오페라에서 주연급 희극 배우 역을 맡는다. 조지 그로스미스는 오페라에 출연하는 동안에도 개인 파티와 마티네(주간 연극 공연)에서 피아노 연회 연주는 물론 자신의 작품과 곡을 꾸준히 써 나간다. 조지는 당대 가장 성공한 희극배우가 되었고, 수많은 오페레타 (보통 희극적인 주제의 짧은 오페라), 100여 곡의 오페라 소곡 (피아노 소극), 약 600여 개의 노래 및 짧은 피아노곡을 작곡했으며 3권의 책을 집필한다. 1889년 조지 그로스미스는 오페라 소곡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길버트 설리번과의 관계를 접지만 1908년까지 연기 생활을 이어가고, 1912년 생을 마감한다.
삽화-위돈 그로스미스
동생 위돈 그로스미스는 화가로서 영국 왕립 미술원과 그로브나 미술관에 작품을 전시한다. 또한, 위돈은 펀치 잡지와 저명한 아트저널에 삽화를 기고한다. 하지만 화가로서의 재정적인 삶에 만족하지 못한 위돈은 1885년경 배우로 직업을 전향한다. 위돈은 1918년까지 연극배우로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며 연기생활을 계속하는데, 그가 묘사했듯이 그는 ‘겁쟁이, 비열한 인간, 속물’ 그리고 권력 아래 주눅이 든 소인으로 회자된다. 위돈은 여러 편의 연극 대본을 썼는데 그 중에 <파티의 밤 (1901)>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두고, 1894년부터 두 개의 웨스트 앤드 극장 경영에도 참여한다. 그는 1894년 세상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