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옆자리가 비어 있었지만, 감히 가방을 내려놓지 못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무릎 위에 등나무 가방을 올려놓고, 이 오만한 사람들이 틀림없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걱정 때문에 눈을 들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좌석 밑으로 보이는 것들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다른 여자들이 신은 고급스러운 신발이 눈에 들어오자, 자기가 신고 있는 신발이 더욱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여자는 여름용 담비 모피 가운 아래로 나온 다리를 세련되게 꼬고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는 여자들의 발과 남자들이 신은 대담한 무늬의 스키 양말을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의 모습이 자신과 너무도 다르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모욕적인 기운이 파도처럼 밀려와 부유함의 지옥에 들어와 앉아 있는 여자의 뺨을 끊임없이 때렸다. 예상치 못했던 이 낯설고 우아한 사람들 사이에 앉아서 어떻게 절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겁먹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마다 여자에게 새로운 고통을 안겨주었다. 맞은편 좌석에는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발바리 강아지 한 마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앉아 있었다. 강아지는 게으르게 엎드린 채 기지개를 켰다. 모피로 레이스를 달아놓은 강아지 옷에는 명품 브랜드의 모노그램이 새겨져 있었다. 강아지 털을 간질이는 소녀의 작은 손톱은 붉은색으로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고, 손가락에 낀 반지에는 다이아몬드가 번쩍이고 있었다. 구석에 세워둔 골프클럽에도 부드러운 크림색 고급 가죽을 댄 우아한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여러 개의 우산에도 각양각색의 고급스러운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여자는 무의식적으로 얼른 손을 움직여 싸구려 가짜 뿔로 만든 자신의 우산 손잡이를 가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제발 아무도 이 우산을 보지 못했으면.’
여자는 걱정스러워 더욱 몸을 움츠렸고, 앞자리에서 웃음이 터져 나올 때마다 꾸부정한 등을 타고 불안감이 밀려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웃는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pp.63~65
이제 그녀는 가는 곳마다 ‘크리스티아네 폰 볼렌’으로 알려졌다. 여기저기서 그렇게 소개되고 불리다 보니 그녀는 별 저항감 없이 그 이름에 익숙해졌다. 부드러운 색조에 윤이 나는 가구가 있는 방에 익숙해지듯이, 호텔의 호화스러움과 안락함에 익숙해지듯이, 큰 지출에 익숙해지듯이, 온갖 매혹적인 것들에 도취하듯이 익숙해졌다. 별안간 여자를 잘 아는 누군가 ‘호프레너 양!’ 하고 부르면 그녀는 몽유병 환자가 최면상태에서 깨어나듯 깜짝 놀랄 것이다. 꿈속에서 겪어봤듯이 산꼭대기에서 추락하는 기분일 것이다. 여자의 새 이름은 완벽하게 그녀의 일부가 되었고, 여자는 자신이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p.149
새 옷을 입자 걸음걸이부터 달라져 육감적으로 엉덩이를 흔들며 우아하게 걸었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자신감이 솟아났다. 밖으로 나와 사람들과 신나게 떠들어대자 놀랍게도 그때까지 늘 지쳐 있었던 몸에도 활기가 되살아났다. 춤은 여자의 몸을 유연하게 만들어주었으며 그녀가 새롭게 발견한 힘과 다시 찾은 젊음이 그녀의 재능을 거듭 확인하게 해주었다. 심장은 격렬하게 고동쳤고, 언제라도 날아오를 듯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끊임없이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가슴은 마치 감전된 듯한 전율을 손가락 끝까지 전해주었다. 그것은 이상하고, 강렬하고,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이제는 오히려 가만히 앉아 있기가 어려워졌고, 갑자기 몰아닥친 강풍에 날리듯 여자는 여기저기로, 안으로 밖으로, 위층과 아래층으로 분주히 돌아다녔다. 계단을 오를 때에도 한 번에 한 칸씩 오르는 일이 없었다. 뭔가를 잊은 사람처럼 마음이 들떠 늘 세 칸씩 올랐다. 놀고 싶은 충동과 애정과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해서 손은 늘 사람이든 물건이든 무언가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 양팔을 활짝 펼치고 먼 곳을 향해 터져 나오는 웃음과 환호를 참아야 했다. ---p.150
크리스티네, 또다시 직업소개소에 가서 구걸하는 거지처럼 대기표를 받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짓은 못 하겠어. 그러느니 차라리 죽고 싶어. 그동안 나는 일자리를 찾느라고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거절이 예정된 전화를 걸고, 답장 없는 편지를 보내고, 아침이면 청소부가 쓰레기로 가져가는 이력서와 구직신청서를 수도 없이 썼어. 이제 더는 못 하겠어. 그나마 입사를 지원했던 회사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통지를 받을 때도 있었지. 대기실에서 나와 똑같은 처지에 놓인 다른 지원자들과 함께 비참한 기분으로 앉아 기다리다가 한참 만에야 호명되어 비굴하게 굽실거리며 면접실로 들어가면 면접
관이라는 자들이 냉랭하고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오만하게 나를 뜯어보며 앉아 있었어. 수십, 수백 명의 지원자가 일자리 하나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데,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내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면접관이 내 옷을 하나하나 벗겨 내듯이 내 신청서와 이력서를 훑어볼 때마다 나는 한편으로 취직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과 다른 한편으로 팔려가기를 기다리는 애완동물 상점 쇼윈도의 강아지가 되어버린 모욕감 사이를 오가며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내부 심사를 거쳐 결과는 수일 내에 개별적으로 통보하겠습니다.’ 그러나 통보는 대부분 ‘애석하게도……’라는 문구가 달린 불합격 통지였어. 나는 취직될 때까지 그 짓거리를 계속했어. 그리고 설령 취직이 되어도 일 년 후에는 어김없이 해고되었지. (…) 언젠가는 그 지겨운 신세를 면하고 자리를 잡아 한 단계 두 단계 올라가면서 성공할 수 있으리라 믿었으니까. 그런데 매번 밑으로 떨어지기만 해. 요즘은 남에게 구걸하느니 차라리 때려죽이거나 총으로 쏴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이제 더는 직업소개소 대기실을 어슬렁거리거나 곧바로 쓰레기가 되어버릴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쓰는 일은 안 할 거야. 나도 이제 나이가 서른이야. 더는 못 하겠어.
---pp.405~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