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 트라폴리는 고등학교 음악반에서 첼로를 연주했다. 때는 1922년. 파시스트들이 로마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녀는 열여섯 살이었다. 그녀가 다른 소녀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아드리안의 눈에는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만 보였다. 그녀는 이 세상 어떤 여자와도 다른,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가 그녀와 아는 사이가 되기까지에는 여러 해가 걸렸다. 그는 그녀가 출연하는 학교 연주회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보러 갔고, 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도시의 모든 연주회에 쫓아다녀서 결국 그녀가 시립 음악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당시 아드리안은 젖소 냄새를 풍기며 집집이 우유를 배달하던 건장한 체구의 젊은이였다. ---p.10
“유럽은 어떤 곳이야?” 어느 날 엘레아노르가 알마 고모에게 물었다. “아주 오래된 곳이지.” 알마가 대답했다. 엘레아노르는 아빠와 고모가 살았던 곳, 대대로 선조가 살았다는 그 오래된 땅에 가보고 싶었다. 엘레아노르는 유럽에 대해 고모에게 꼬치꼬치 묻기 시작했다. 아빠와 고모가 살던 집은 어땠는지, 그들이 살던 마을은 어떻게 생겼는지, 학교에서는 무엇을 배웠는지, 할아버지는, 친구들은, 그곳 주민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끊임없이 물었다. 기억을 더듬어 조카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던 알마는 지난날이 견딜 수 없이 그리워졌다. 결국, 알마는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선언했다. “나는 스위스로 돌아갈 거야.” ---p.108
그로부터 5년 후 알마 트랩은 자신이 살던 로잔의 옛집 앞에 서 있었다. 때는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는 오월 어느 날이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알마는 거실까지 걸어 들어가 마치 지난 26년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체스를 두고 있는 아버지와 아드리안을 보았다. 그들은 체스판에서 눈을 들어 알마를 바라보았다. 세 사람 모두 놀라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상대를 알아보았다. 라조스는 예순여덟 살이었고, 아드리안은 쉰 살, 알마는 마흔여덟 살이었다. ---p.117
줄리아노는 여덟 살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비엔나의 명문 악기 제조자 팀 가문에서 1770년에 제작한 낡은 바이올린으로 연습했다. 그것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외고모할머니 엘레나 페트론치니가 알바니아에서 가져온 바이올린이었다. 삶과 사랑과 음악이 저음 악기들이 내는 소리처럼 신비롭게 얽히고 있었다
1922년 스위스 로잔. 열여덟 살 아드리안은 아름다운 첼로 연주자 알마를 처음 본 순간,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한낱 우유배달부에 불과했던 그는 알마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음악 수업을 청강하고 첼로를 배우는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녀는 냉담하기만 하다.
그는 오케스트라 단장이자 체스광인 그녀의 아버지와 가까워지기 위해 이번에는 체스를 배우고 각고의 노력 끝에 스위스 체스 챔피언이 되지만, 사랑하는 여인은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랑의 묘약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달콤 쌉쌀한 초콜릿. 그는 초콜릿의 신비스러운 힘으로 알마를 유혹하기로 작정하고 그녀가 오가는 길목에 초콜릿 가게를 열고 그녀가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음악도 체스도 움직이게 할 수 없었던 난공불락 알마의 마음은 드디어 초콜릿의 마력 앞에서 무너지지만, 그녀는 끝내 미국인 비행기 조종사와 결혼하여 대서양을 건넌다. 그러나 아드리안에게 그녀의 결혼은 사랑의 종말이 아니라, 그가 평생을 바쳐야 할 사랑의 시작에 불과했다.
1920년대 스위스에서 시작된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는 재즈가 한 시대를 풍미하던 미국과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태풍의 눈과 같았던 스위스를 배경으로 슬프고도 아름답게 펼쳐진다. 열정과 죽음, 음악과 체스, 우연과 필연의 역사가 초콜릿처럼 녹아 있는 함축미 빛나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