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육원에 있다가 하산 아저씨에게 입양되어 모스크(서울 한남동 소재) 근처 허름한 동네에서 산다. 틀에 박힌 제도 교육을 거부하여 학교에는 다니지 않는다. 보육원 시절에 학교에 잠깐 다닌 적이 있지만, 운동장 주변에 있는 동상들의 팔을 부러뜨리고 매일 오전 열한시에 뛰쳐나가 화단에 오줌을 눔으로써 문제아로 낙인찍힌 바 있다. 나의 몸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큰 상처가 있다. 나중에 하산 아저씨가 일러준 바에 따르면 그건 총상임에 분명하고, 그 때문에 부모님과 헤어져 고아가 되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아무려나 그와 비슷한 상처가 하산 아저씨의 몸에도 있는데, 그 상처들은 둘 사이가 혈연 이상의 관계로 엮여 있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나는 주로 하산 아저씨가 운영하는 정육점이나 안나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충남식당에 있으면서 잡지나 신문에서 사람 얼굴을 오려 스크랩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스크랩된 사진들은 나중에 모자이크처럼 이어 붙여져 사람들 사이를 연결하는 큰 지도로 만들어지는데, 그 지도는 결국 인종이나 국가, 종교 등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의 무의미함을 역설하는 알레고리가 된다. 하산 아저씨가 기력을 잃고 쓰러져 결국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나는 그에게 ‘아버지’라 부르며 ‘사랑한다’고 말한다.
“제 말 들으셨어요? 사랑해요. ……사랑한다구요!”
나는 내 몸속으로 의붓아버지의 피가 흘러들어온 걸 느꼈다. 뜨거웠다. 인간의 모든 기억들이 이처럼 단순하고 정직하게 이어진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훗날 내 자식들에게 나의 피가 아닌 의붓아버지의 피를 물려주리라. 병실 구석에 섰던 이맘이 다가와 나를 껴안았다. 그날 나는 이 세계를 입양하기로 마음먹었다. (236쪽)
하산 아저씨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터키인인데, 전쟁이 끝난 후에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귀화한 인물이다. 모스크 근처의 허름한 건물에서 정육점을 열고 있지만, 장사는 신통치 않고, 결국 건물주가 세를 올려달라고 했을 때는 가게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게 된다. 하산 아저씨는 독실한 이슬람 교인으로 『꾸란』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 책을 전부 외우고 있는 인물이지만, 이슬람에서 금지한 돼지고기를 팔고 있는 모순된 생활을 하고 있다. 이는 모두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상처 때문인데, 전쟁 중에 살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공포와 광기의 순간에 사람의 살점을 먹었던 기억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이다. 하산 아저씨는 라마단 기간에 금식을 한 후 기력을 되찾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다.
야모스 아저씨는 하산 아저씨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그리스인인데, 전쟁 후 한국에 눌러앉은 인물이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전, 그리스 내전 당시 전투기를 몰다가 적병으로 오인해 사촌 일가를 죽인 죄책감 때문에 귀국을 하지 못한 경우이다. 그는 안나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충남식당 위층 다락방에 기거하며 밥을 빌어먹고 산다. 매우 소심하고 나약한 영혼의 전형이지만, 작품 속에서 각각의 인물들의 내면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으며, 또한 유머와 낭만을 아는 인물로서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한다.
대머리 아저씨는 한국인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지만 전쟁의 상처로 당시의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인물이다. 때문에 나중에 책이나 전쟁백서 등을 통해 자신이 참전하지 않은 전투까지 상세하게 공부해서 모든 전투를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처럼 기억하고 있는 인물이다. 군복을 자주 입고, 소리소리 지르며 군가를 부르며 우는, 역시 상처를 간직하고 사는 영혼이다.
안나 아주머니는 동네의 사랑방과도 같은 충남식당을 운영하면서 하산, 야모스, 대머리 아저씨를 특유의 여성스러움으로 포용하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안나 아주머니 역시 폭행을 일삼는 남편을 피해 도망치듯 나와 살고 있는 인물이다. 나중에 시아버지가 찾아와 남편의 죽음을 알리자 그제야 서러운 울음을 토해내고, 이후 트럭을 한 대 빌려 교외로 나가는 소풍을 기획한다. 등장인물들 모두가 참여하는 축제와도 같은 소풍을 통해 사람들은 조금씩이나마 상처를 치유받는다.
이 외에도 나의 친구로 ‘유정’과 ‘맹랑한 녀석’ 등이 등장한다. 연탄장수의 아들인 유정은 말더듬이이지만, 소설가를 꿈꾸며 동물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동네의 시시콜콜한 뒷얘기들을 동물들에게서 들은 뒤 나에게 전한다. 학교에서는 늘 꼴찌이고 말을 더듬기는 하지만, 그는 가장 상상력이 풍부하고 스펙트럼이 풍부한 언어를 구사한다. 나중에 어머니가 집을 나가자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게 되었는데, 그 후로는 모스크로 오르는 계단에 앉아 자주 서울 시내를 내려다본다.
맹랑한 녀석은 가난한 집안에 버림받듯 태어나 염세주의자가 되었다. 늘 “죽을 건데 뭐”란 말을 달? 사는 그의 염세주의는 쌀집 둘째 딸에게 사랑을 인정받지 못하자 더욱 강화되었다. 유일한 친구는 노란줄무늬 고양이. 대머리 아저씨와 6?25 참전용사들의 집회에 다녀온 후 그는 대머리 아저씨의 상처와 잃어버린 명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머리 아저씨의 명예를 되찾아주기 위해 그의 군복 등속을 태운다.
평상 옆에 앉아 간단하게 묵념을 한 뒤 신문지를 불쏘시개 삼아 대머리 아저씨의 물건들을 태웠다. 그것들은 마치 유품 같았고 우리는 제의를 집행하는 사제가 된 것 같았다. 한 시대가 태워졌다. 한 사람의 과거가 타올랐다. 검고 악취 나는 연기를 피워 올리면서. (2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