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예술가들의 천재성이란 남들은 도저히 쳐다볼 수 없는 높은 경지를 저 혼자만이 도달하는 기량을 의미하는 수가 많다. 그러나 단원은 그런 류의 천재가 아니었다. 그는 남들과 나누어 쓸 수 있는 폭 넓은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단원 김홍도는 보통 예술적 천재들이 지닌 부정적 측면, 괴팍하고 고집 세고 이기적이고 방자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탁원한 기량을 과시하는 천재가 아니라 자신의 천재성을 남들과 분유하고 공유할 수 있는 양식을 창출하는 데 발휘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미켈란젤로나 모차르트 또는 추사 김정희 같은 천재와는 전연 다른 성격의 천재였고, 성품 또한 그들처럼 오만하거나 독선적이지 않았다, 대중과 그처럼 교감할 수 있는 자세였기에 그의 예술은 인간적인 가장 인간적인 것이었고, 또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이 단원이라는 화인의 위대한 예술가 상이다.....
--- pp.317~318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예술에 대해서는 당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명성과 찬사와 존경의 예찬이 이어지고 있다. 겸재가 이룩한 예술 세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진경산수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또 그것을 완성한 것이다. 그는 중국풍의 그림을 답습하던 종래 화가들의 관념산수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직접 사생하여 이를 감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진경산수의 창시자가 되었고, 또 그것은 후대에 두고 두고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하여 겸재의 진경산수는 줄곧 민족적 산수화풍으로 이해되고 한국적 산수화풍의 창시자로 평가되어 왔다,
진경산수의 사회적 배경은 조선 후기 숙종 · 영조 연간에 일어난 사회 · 문화 · 예술 전반의 사조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사상에서 실학의 대두, 문학에서 한글소설 · 판소리의 등장과 사설시조의 유행, 그림에서 현실을 소재로 담은 속화(俗畵)의 탄생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그 모두를 '리얼리즘시대'의 산물로 이해해왔으며, 그런 인식 틀은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근래 겸재의 진경산수를 다른 각도에서 보는 두 가지 견해가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하나는 최완수를 비롯한 이른바 '간송학파'들이 겸재의 진경산수를 율곡에서 완성된 조선 성리학이 노론의 정치적 이념으로 구현된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의 산물이라 주장한 것이고, 또 하나는 홍선표, 한정희, 고연희 등 홍익대 출신 중견 · 신진 학자들이 진경산수는 명나라 때의 <황산도(黃山圖)> 같은 실경산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학설은 겸재의 예술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는 데 나름대로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 두 학설 모두 적지 않은 과장과 오해가 있었다.
---pp.186~188
[한국회화사에서 관아재의 위치]
그는 그림이 세상에 공헌하는 바, 인간의 정서 함양에 기여하는 바를 정확히 인식하며 글과 시가 할 수 없는 것을 그림이 해낼 수 있다고 믿으며 그림을 그렸다. 그는 그림이란 현실 속에 있어야 한다는 투철한 사실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그린 인물은 화보 속의 인물이 아니라 대개 현실 속의 인물이었으며, 나아가서는 서민들의 삶을 애정어린 시각으로 그린 속화를 많이 그렸다.
--- p.180
[한국회화사에서 관아재의 위치]
그는 그림이 세상에 공헌하는 바, 인간의 정서 함양에 기여하는 바를 정확히 인식하며 글과 시가 할 수 없는 것을 그림이 해낼 수 있다고 믿으며 그림을 그렸다. 그는 그림이란 현실 속에 있어야 한다는 투철한 사실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그린 인물은 화보 속의 인물이 아니라 대개 현실 속의 인물이었으며, 나아가서는 서민들의 삶을 애정어린 시각으로 그린 속화를 많이 그렸다.
--- p.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