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이 특허청 일자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901년 3, 4월경이었다. 그러나 지루한 기다림은 계속되었다. 그 일자리는 12월까지도 공고되지 않았고, 그는 1902년 6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3급인 특허청 검사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는 2월 초에 혼자 베른으로 거처를 옮겼다. 직장은 구했지만 결혼을 하기까지에는 참을성 있는 밀레바도 놀랄 만한 장애물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는 찬성이 아니라면 최소한 묵인이라도 부모의 동의 없이는 결혼할 수가 없었다. 1902년 10월에 그는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급히 이탈리아로 달려갔고 부친의 임종 직전에 도착했다. 두 남자는 대화를 나누었다. 헤르만은 아들의 연인 선택에 대해 아내보다 단호하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밀레바를 결코 며느리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헤르만은 양보를 하고 두 사람의 결합에 동의했다. 그 뒤 헤르만은 가족에게 자신을 벽 쪽으로 돌려주고 혼자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알베르트는 방에서 나왔고 10월 10일, 그의 아버지는 홀로 외로이 숨을 거두었다. --- <1장 모든 종류의 권위에 대한 의심> 중에서
아인슈타인은 1907년의 논문에서 다른 개념들을 추구하며 특히 중력과 빛의 상호작용에 대한 더 기술적인 문제들을 다룬다. 그가 중력이 빛을 휘게 할 수 있다고 가장 처음 제안했던 게 바로 이 논문이었다. 그는 또한 중력에 의한 빛의 적색이동으로 알려진 효과도 분석했다. 이 설명에서 빛의 파장과 색은 광원의 질량에 따라 변한다. 즉 질량이 클수록 중력의 당김은 강해지며 이것이 적색, 즉 더 긴 파장 쪽으로의 더 큰 이동을 일으킨다. (가시광선의 무지개 스펙트럼에서 보라색과 청색은 더 짧은 파장을 갖고 적색은 더 긴 파장을 갖는다.)
두 개념 모두 본질적으로 옳았지만, 아인슈타인은 빛의 굴절에 관한 세세한 계산에서 잘못된 수들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개념은 중력이 상대론적 우주에서 어떻게 작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도와주는 유용한 발판이었다. 이 단계에서 그가 확실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등가원리뿐이었지만, 이 원리가 그 뒤에 이어지는 중력에 대한 그의 모든 생각을 움직였던 게 틀림없다. 그는 이 새로운 이론이 중력을 어떤 거리에서도 즉시 영향을 미치는 힘으로 설명하므로, 뉴턴 이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게다가 속도변화가 중력마당의 당김과 동일한 관측 효과를 일으킨다는 사실은 아인슈타인에게 그의 이론이 중력을 운동하는 질량의 특성으로 묘사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했다. --- <5장 불필요한 지식들> 중에서
엘자와 아인슈타인이 은밀히 애정을 나누던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아인슈타인은 열정과 애정으로 끓어넘쳤다. “당신과 며칠간을 보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소.” 그는 1913년 봄에 이렇게 편지를 썼고, 베를린의 제의를 받은 뒤에는 “내가 하고 싶은 많은 일들 가운데 하나는 종종 당신을 만나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엘자는 그렇게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그녀는 눈을 감을 때까지 이 기간의 편지를 소중히 간직했다. 편지들이 발견되었을 때 그것들은 리본으로 곱게 묶여 있었고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특히 아름다운 편지들”이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아인슈타인과 밀레바와의 관계가 그해와 다음해를 거치면서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되고 있었으므로, 이 편지들은 임박한 이별을 반영했다. 만약 그녀가 알고자 했었다면 이 편지들은 엘자에게 그녀가 결혼하고 싶어하는 남자에 대한 어떤 사전 경고를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는 그가 아내를 “내가 해고할 수 없는 가정부”로 묘사했던 시기였다. --- <9장 결혼, 또다른 노예제도> 중에서
아인슈타인에 대한 신격화는 단순히 기술적 운명이나 혹은 우연히 그런 일을 해낼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전기작가 에이브러햄 파이스는 그가 구체적으로 표현한 신비는 그의 숭배자들이 그의 생각들에 대한 실제 이해와 같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더럽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와 같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더럽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즐겼던 숭배가 생기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도 로테르담에서 한 인터뷰에서 똑같은 의견을 말했다. 왜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이론들”에 그렇게 흥분하는 걸까? 그는 이렇게 묻고는 대답은 간단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그들에게 어필하는 이유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신비라고 확신한다. --- <14장 대중 앞에 서다> 중에서
아인슈타인은 유대인들에 대한 학대를 조용히 참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말만으로 1919년에 발표된 동부 유대인들의 강제이주 계획을 비난했다. 그들, 즉 독일의 가장 약하고 가장 상처받기 쉬운 유대인들에 대한 공격이 더 노골적이고 더 잦아지자 그는 한 발 더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1917년에 영국의 ‘밸푸어 선언’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립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시온주의 운동이라는 민족주의적 야망들에 대한 강대국의 지지를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1921년에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의 독립국가 건립 지지를 발표함으로써 시온주의자들과 그들의 지도자인 영국의 화학자 하임 바이츠만과 공공연히 제휴했다. “자신들에게 지옥을 의미하는 동부 유럽으로부터 벗어났을 뿐인 이들 불행한 망명자들을 적대시하는 선동은 오늘날 모든 선동 정치가들에 의해 성공적으로 사용되는 효과적인 정치적 무기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한 유대인들에 대한 공격은 “내게 유대인의 민족감정을 일깨워주었고”, 결국 그것이 그로 하여금 “모든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유대 국가의 보존을 요구하게” 했다. --- <15장 동료들과의 갈등> 중에서
아인슈타인은 신이 우주를 어떻게 만들었어야 했는지 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세상의 눈에는 보어가 이겼지만 아인슈타인은 1927년의 솔베이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결코 설득되지 않았다. 1933년에 옥스퍼드의 한 강연에서 그는 자신의 신조를 이렇게 언급했다. “나는 여전히 실체의 모형, 즉 단순히 사건들의 가능성이 아니라 그 자체를 표현하는 이론의 존재 가능성을 믿는다.” 말년에 그의 믿음은 흔들렸지만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1953년에 그는 “더 완벽한 양자론의 열쇠를 줄” 아이디어 탐색이 “확실한 확신이 아니라 소박한 소망”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썼다. 2년 뒤 마지막 기록들 가운데 하나에서 그는 자신의 의심을 훨씬 더 분명히 내비쳤다. “원자와 양자현상을 인과관계로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할 어떤 이론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는 이렇게 시인하면서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양자문제가 다른 방법에 의해 원칙적으로 해결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감 있게 ‘가능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설사 찾지 못한다고 해도 ‘진리의 확실한 소유보다 진리에 도달하려는 열망이 더 소중하다’는 레싱의 말은 위안이 된다”고 덧붙였다. --- <19장 아무튼 난, 확신한다> 중에서
히틀러의 갑작스런 등장은 독일 국가에 대한 그의 오랜 불신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는 히틀러나 국가사회주의를 영구적인 위험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그 사람을 경멸했을 뿐이었다. 1930년 12월에 독일 정치에 등장한 이 새로운 유력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히틀러 씨와 일면식도 없습니다. 그는 독일의 허기진 배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어요. 경제사정이 나아지면 그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히틀러를 영락하게 하는 데 어떤 조치도 필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 유대인 통신사에 나치의 성공은 “일시적으로 절망적인 경제 상황”과 “공화국의 고질적인 어린애 같은 병” 때문이라고 재차 단언했다. “유대인의 결속은 항상 필요하다고 믿지만, 이 선거결과에 대한 어떤 특별한 반응도 아주 부적절할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썼다. --- <21장 늑대들이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중에서
지나간 겨울 동안 떠날 채비가 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932년 내내 베를린과의 연결을 공공연하게 끊으려고 하지 않았다. 프린스턴과 고등학술연구소는 만약 독일에서의 삶이 아주 지탱하기 어려워지게 된다면, 그가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은신처인 셈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으로 떠나는 것에 대해 단계적으로 발표함으로써, 그가 그나마 독일에서 견딜 수 있게 해주었던 마지막 이유들 가운데 하나처럼 보이는 소중한 사람들의 충격을 덜어주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1932년 10월에 그는 향후 5년 동안 미국에서 매년 5개월을 보내기로 결심했다는 소식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가 《뉴욕 타임스》에 강조했듯이, 그의 마음은 결코 독일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독일을 버리는 게 아닙니다. …… 나의 영구한 집은 여전히 베를린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 <23장 새로운 선택> 중에서
히틀러를 패배시키려는 아인슈타인의 노력은 1939년과 1940년에 절정에 달했다. 그때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미국의 원자폭탄 제조 가능성에 대한 두 통의 편지를 발송했다. 1938년 말에, 여전히 베를린에서 연구 중인 두 과학자인 오토 한과 프리드리히 슈트라스만은 새로 발견된 아원자 입자인 중성자로 우라늄을 포격하는 일련의 실험을 통해 얻은 다소 진기한 결과들을 해결하느라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전에 한과 공동연구를 했던 리제 마이트너와 그녀의 조카 오토 프리슈는 히틀러의 독일에서 망명해, 쿵겔프라는 스웨덴의 마을에서 크리스마스 때 만나 함께 베를린 연구자들이 관측했던 과정을 확인했다. 즉 우라늄 원자들을 때리는 중성자들이 핵분열을 유발했다. 핵분열이란 에너지와 더 많은 중성자들이 방출되는 원자핵의 격렬한 파괴이다. 이 결과는 전시의 비밀이 폐막의 신호를 하기 수개월 전에 발표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모든 유능한 물리학자는 각 분열사건이 더 많은 중성자를 방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로운 중성자들이 단계적으로 더 많은 원자들을 쪼개는 연쇄반응의 가능성을 일으킨다는 걸 깨달았다. 신문들에게조차 다음 단계는 분명했다. 1939년 봄에 《워싱턴 포스트》는 핵분열이 결국 2평방마일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시키기에 충분한,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 <24장 평화를 위한 변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