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었는가 우리가 손잡고
나무들 사이를 걸어간 그 저녁의 일을
우리 등 뒤에서 한숨지며 스러지던
그 황혼의 일을
나무에서 나무에게로 우리 사랑의 말 전하던
그 저녁새의 일을
잊었는가 우리가 숨죽이고
앉아서 은자처럼 바라보던 그 강의 일을
그 강에 저물던 세상의 불빛들을
잊지 않았겠지 밤에 우리를 내려다보던
큰곰별자리의 일을,그 약속들을
별에서 별에게로 은밀히 말 전하던
그 별똥별의 일을
곧 추운 날들이 시작되리라
사랑은 끝나고 사랑의 말이 유행하리라
곧 추운 날들이 와서
별들이 떨어지리라
별들이 떨어져 심장에 박히리라
너의 묘비명
너의 묘비명인
나,여기에 서 있다
너는 내 두눈에
이름 석 자를 새겨놓고 눈부시게
날아갔구나
차라리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너,바람의 기억속에 묻히고
너의 묘비명인
나,여기에 홀로 서 있다
여섯 줄의 시
너의 눈에 나의 눈을 묻고
너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묻고
너의 얼굴에 나의 얼굴을 묻고
말하렴,오랫동안 망설여왔던 말을
말하렴,네 숨 속에 숨은 진실을
말하렴,침묵의 언어로 말하렴
--- p.
어느날 기린보다 높은 심장을 가진 이가 와서
나무의 여린 잎사귀를 건드린다
어느날 기린보다 높은 심장을 가진 이가 와서
붉은 열매가 익기 전에 빛으로 터뜨린다
그리고 잠시 빛이 져버린 한적한 물가로 걸어나가면
바람은 구름을 몰아 비를 뿌리고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그렇게 내 모습도 비그늘 속에 잠겨
흐르는 시간 속에 져버린다
한때 불꽃의 오솔길을 뚫고 지나가던 힘은 이제
보이지 않는 시선 아래
시든 잎사귀를 흔들고 옛날을 기억한다
나는 내 손의 움직임을 바라본다
내 손은 물 위에 무엇을 그린다 그 저녁
내가 쓰는 시들은 모두 내 손을 지나
물 속으로 들어간다
어느날 기린보다 높은 심장을 가진 이가 와서
내 몫의 빵과 술을 엎질러 버린다
어느날 기린보다 높은 심장을 가진 이가 와서
내 입술을 침묵으로 몰고 간다
--- p.62-63
안개 속에 숨다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 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까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감을 두려워한다.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다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 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 pp.9-10
소금인형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 p.17
새와 나무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 p.27
사람들이 방안에 모여 별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문밖으로 나와서 풀줄기를 흔들며 지나가는
벌레 한마리를 구경했다.
까만 별레의 누에 별들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는
벌레를 방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어느새 별들은 사라지고
벌레의 눈에 방안의 전등불만 비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벌레를 풀섶으로 데려다 주었다.
별들이 일제히 벌레의 몸안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 p.67
분명히 이곳에 어떤 눈이 하나
있었다 나무들 사이에
양떼구름들 속에
기억나지 않는가, 기억해 보렴
분명히 너는
이곳을 지나갔었다, 그때
어떤 눈이
너의 삶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다, 분명히
이 저녁안개 속에서 너의 삶이
천천히 흘러갔었다 그때
무엇인가
이곳에 있었다 저 뒤에
저 뒤켠에서
너를, 너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가, 기억해 보렴
그때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떤 생각들이 너의 머리를 사로잡고 있었다
너는 일찍이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렸다
아니, 모든 것을 알았다
그래서 네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저곳에서 새의 눈이
저 나무 꼭대기 위에서 너를,
너의 눈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눈이
--- p.56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 p.17
바다에 섬이 있다
섬 안에 또 하나의 바다가 있고
그 바다로 나가면 다시 새로운 섬
섬 안의 섬 그 안의 더 많은 바다 그리고 더 많은 섬들
그 중심에서 나는 잠이 들었다.
잠들면서 꿈을 꾸었고
꿈 속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또 꿈꾸었다.
꿈 속의 꿈 그리고 그 안듸 더 많은 잠 더 많은
꿈들
--- p. 24
민들레 풀씨처럼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게
그렇게 세상의 강을 건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슬픔은 왜
저만치 떨어져서 바라보면
슬프지 않은 것일까
민들레 플씨처럼
얼마만큼의 거리를 갖고
그렇게 세상 위를 떠다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 p.12
목련을 습관적으로 좋아한적이 있었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
목련 나무 줄기는 뿌리로부터 꽃물을 밀어올리고
나는 또 서러운 눈물을 땅에 심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나는 버릴 수 있었지만
차마 나를 버리진 못했다
목련이 필때쯤이면
내 병은 습관적으로 깊어지고
꿈에서마저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흰 새의 날개들이 나무를 떠나듯
그렇게 목련의 흰 꽃잎들이
내 마음을 지나 땅에 묻힐때
삶이 허무한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나는 등을 돌리고서서
푸르른 하늘에 또 눈물을 심었다
--- p.15
누구는 종이 위에 시를 쓰고
누구는 사람 가슴에 시를 쓰고
누구는 자취 없는 허공에 대고 시를 쓴다지만
나는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
눈이 녹아 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 p.96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여기 죽은 나무가 있다
누군가 소리쳐서 뒤돌아보니
그곳에 내가 쓰러져 있었다
물을 주면 살아날지도 몰라
누군가 다가가서 흔들어 본다
죽은 나무는 기척이 없다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그냥 잎을 버리고 죽을 뿐이다
--- p.76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것이
슬픔,너였구나...
--- p.86
나는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
눈이 녹아 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 p.96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겨울숲에서 노려보는 여우의 눈처럼
잎 뒤에 숨은 붉은 열매처럼
여기
나를 응시하는 것이 있다
내 삶을 지켜보는 것이 있다
서서히 얼어붙는 수면에 시선을 박은 채
돌 틈에 숨어 내다보는 물고기의 눈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건방진 새처럼
무엇인가 있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는 그것
눈밖에 없는 그것이
밤에 별들 사이에서, 내가 좋아하는
큰곰별자리 두 눈에 박혀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때로 그것은 내 안에 들어와서
내 눈으로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내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 p.22
겨울숲에서 노려보는 여우의 눈처럼
잎 뒤에 숨은 붉은 열매처럼
여기
나를 응시하는 것이 있다
내 삶을 지켜보는 것이 있다
서서히 얼어붙는 수면에 시선을 박은 채
돌 틈에 숨어 내다보는 물고기의 눈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건방진 새처럼
무엇인가 있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는 그것
눈밖에 없는 그것이
밤에 별들 사이에서, 내가 좋아하는
큰곰별자리 두 눈에 박혀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때로 그것은 내 안에 들어와서
내 눈으로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내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 p.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