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金素月, 1902년 8월 6일 - 1934년 12월 24일)은 일제 강점기 시인이다.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이지만, 호인 소월(素月)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본관은 공주(公州)다. 1934년 12월 24일 평안북도 곽산 자택에서 향년 33세로 음독자살한 그는 서구 문학이 범람하던 시대에 민족 고유의 정서에 기반한 시를 쓴 민족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생애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출생하였고 평안북도 곽산군에서 성장하였다. 1904년 처가로 가던 부친 김성도는 정주군과 곽산군을 잇는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당한 후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이후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조부의 손에서 컸다. 김소월에게 이야기의 재미를 가르쳐 주어 영향을 끼친 숙모 계희영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평안북도 곽산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조만식과 평생 문학의 스승이 될 김억을 만났다. 김억의 격려를 받아 1920년 동인지 《창조》5호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5년에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발간했다. 1916년 오산학교 재학 시절 고향 구성군 평지면의 홍시옥의 딸 홍단실과 결혼했다.
3·1 운동 이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1923년에는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 서울 청담동에서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고 《영대》동인으로 활동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도왔으나 일이 실패하자 처가인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구성군 남시에서 개설한 동아일보 지국마저 실패하는 바람에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다. 본래 예민했던 그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술로 세월을 보냈으며, 친척들로부터도 천시를 당했고 일본의 압박과 부인과 동반자살 기도까지 했다. 류머티즘으로 고생을 하다가 1934년 12월 24일 평안북도 곽산에서 아편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32세였다.
사후 1977년 사후 43년 만에 그의 시작 노트를 발견했는데, 여기에 실린 시 가운데 스승 김억이 이미 발표한 게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김억이 제자의 시를 자신의 시로 발표했던 것이다. 1981년 금관문화훈장(1등급)이 추서되었으며 서울 남산에 그를 기리는 시비가 세워졌다. 1986년 조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한국 가곡의 20%가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며 그 수에서 가곡시인 중 1위를 차지하였다. (출처 : 위키백과)
김소월 시인은 노래로도 우리와 친숙하다. 진달래꽃은 대학교 때 많이 불려졌고, 다양한 노래가 우리와 함께 한다. 한국 가곡의 상당수가 김소월 시인의 시에서 곡을 붙였다는 점에서 그의 시가 한국적 정서에 참 잘 맞으면서 소박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시는 지금 읽어도 전혀 색다르게 다가오지 않을 정도로 언어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에서 한국적 정서를 담고 있다. 진달래꽃, 산유화, 엄마야 누나야 등 일상 생활 속에서 자신이 느끼고 있는 심정을 소탈한 언어로 짧게 시로 표현한 점이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