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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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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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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2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447쪽 | 602g | 130*190*30mm
ISBN13 9791195575961
ISBN10 1195575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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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배고파!”
다마코도 미자도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 맞다! 주먹밥이 남았재.”
미자는 보자기를 풀었다. 다마코와 마리는 자기들 몫의 주먹밥을 몽땅 먹어치웠지만 피곤해서 도중에 곯아떨어진 미자는 주먹밥 한 개를 남겨두었다.
“근데, 그거 욧짱 몫 아이가.”
다마코가 말했다. 그러면서도 침을 꿀꺽 삼킨다.
“개안타. 다 같이 노나 먹자.”
“맛있겠다! 근데, 왜 욧짱 주먹밥은 갈색이야?”
미자의 주먹밥은 하얗지 않았다. 미자 어머니는 일부러 누룽지가 생기도록 밥을 지어 노르스름한 갈색 누룽지가 밖으로 오게 주먹밥을 빚었다. 덕분에 먹기 좋고 잘 부서지지 않는 주먹밥이 만들어졌다.
“어무이가 누룽지로 만들어주셨거든.”
미자는 주먹밥을 삼등분해 제일 큰 덩어리를 먼저 마리에게 건네고, 다음으로 큰 덩어리를 다마코에게 주었다.
“고마워!”
마리가 예를 표하고 흔쾌히 주먹밥을 받아들었다.
“욧짱, 미안!”
미자 몫의 주먹밥을 가만히 바라보던 다마코는 사과하며 받았다.
“됐다 고마, 개안타. 쪼매씩 묵으면 된다. 이것밖에 없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아이가.”
미자는 언니 같은 말투로 달래며 손에 남은 제일 작은 덩어리를 먹었다.
나라면 저렇게 선선히 내 몫을 양보할 수 있을까. 다마코는 곰곰이 생각했다. 자기 몫의 주먹밥을 들여다보며.
--- p.100~101

까치발하고 푸른 천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자니 감자를 주었던 아주머니가 뒤에서 다가왔다.
“마리는 못 받았지?”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주위 사람들 눈치를 살피는지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마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주머니는 마리의 손바닥에 캐러멜 한 개를 올려주었다. 마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아주머니를 쳐다보았다.
“잃어버리지 말고 어디 조용한 데 가서 먹으렴.”
아주머니는 그렇게 속삭이더니 마리의 작은 손을 아주머니의 큼직하고 탄탄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주머니는 마리가 절대 떨어트리지 못하도록 꽉 쥐었다.
아주머니가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배웅하고 나서 마리는 학교 계단에서 캐러멜을 먹으려고 걷기 시작했다. 그때 다른 아주머니가 마리 앞을 가로막고 섰다. 아주머니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마리가 쥐고 있는 작은 손가락을 투박한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펴더니 우악스럽게 캐러멜을 뺏어갔다. 그리고 옆에 있던 자기 아이한테 빼앗아간 캐러멜을 주었다. 마리는 아주머니가 입고 있던 하얀 앞치마가 눈부셔 눈을 찡그렸다.
아사히나 할머니가 무척이나 좋아하셨던 하얀 감자 꽃. 어머니가 주겠다고 약속하셨던 하늘처럼 푸른 이불. 보라색으로 부풀어 오른 여자아이의 얼굴. 길가에 흥건하게 흐르던 빨간 피. 새까맣게 불타버린 집. 계단에서 보던 하늘과 바다. 하늘에 떠 있던 하얀 구름.
모든 것이 눈이 부셔 마리는 더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다.
--- p.137~138

다마코는 뺨에 눈물 자국을 남긴 채 부부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부는 여기저기 누덕누덕 기우고 덧댄 자국이 있는 옷을 입고 있었다. 아내 쪽은 눈물을 글썽이며 손가락에 끼고 있던 금가락지를 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부부와 남자는 한동안 실랑이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거래가 성사되었는지 남자는 다마코의 손을 당겨 아내로 보이는 여자의 손에 건네주었다. 당황한 다마코는 자신의 손을 살짝 잡는 중국인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그 손은 거칠거칠하게 부르터 있었다.
두 사람은 다마코에게 자신들을 아빠라는 뜻의 ‘??(파파)’와 엄마라는 뜻의 ‘??(마마)’라고 부르라고 가르쳐주었다. 다마코는 시키는 대로 따라 했다. 두 사람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마코의 손을 양쪽에서 잡고 걸어 한 식당으로 들어가더니 밀가루 만두와 배추와 고기와 당면을 넣은 조림을 사주었다. 시큼하게 절여진 배추는 다마코가 여태까지 먹어보지 못한 낯선 맛이었다. 하지만 구수하게 잘 익은 그 냄새는 맡아본 기억이 있었다. 만주의 중국인들은 늘 이 냄새를 몸에 두르고 다녔다. 가끔 찌릿찌릿하게 매운 향내를 내뿜을 때도 있었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몸이 훈훈하게 달아올랐다. 다마코는 다이카주돈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배부르게 먹었다. 다이카주돈을 떠나고 처음 입에 대보는 고기였다. 고기는 입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다마코가 먹는 동안 두 사람은 거의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그저 다마코가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눈을 떼면 다마코가 없어질까 두려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 같았다.
--- p.258~259

“저건 무슨 물고기일까?”
미자는 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붕수도 강에 눈길을 주더니 말했다.
“참숭어.”
“참숭, 뭐라고?”
“일본말로는 보라라고 하더라.”
“아, 보라?”
붕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가끔 생각해보곤 해. 숭어는 조선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잖아. 조선에 사는 숭어랑 일본에 사는 숭어는 뭐가 다를까? 조선 숭어랑 일본 숭어가 바다에서 만나면 무슨 말로 이야기할까?”
엉뚱한 상상에 미자는 웃고 싶었지만 붕수는 웃지 않았다.
“나는 강에서 헤엄치는 걸 좋아해. 강에서 헤엄칠 때는 다들 알몸이 되니까 우리가 허름한 옷을 입고 왔다는 걸 아무도 모르거든.”
미자도 붕수도 원래 하얀 셔츠를 입었지만 여기저기 헤어져 구멍이 나고 갈색으로 색이 바랬다. 변변한 비누 하나 없이 잿물로 빨래하다 보니 하얀 옷도 금세 시커멓게 물이 든다.
“꼬락서니가 이러니 내가 조선인이라는 건 금세 들통나지만, 강에서 헤엄치는 동안에는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니야. 그래서 나는 강에서 헤엄치는 게 좋아.”
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줘서 고마워!”
“내일도 올게.”
붕수가 말했다. 그 후로 일본인 남학생들이 숨어서 미자를 기다리는 일은 사라졌다. 그런데도 붕수는 매일 아침 둑길까지 미자를 마중 와주었다. 만주에서 다마코와 하루히코와 다른 친구들과 함께 기숙사에 다니던 때처럼 나란히 걷지 않고 서로 약간 거리를 두고 떨어져 걸었다. 붕수가 앞을, 미자가 그 뒤를.
미자는 나란히 걷지 못해도 속상하지 않았지만 그런 날은 오래 가지 못했다.
--- p.272~273

전쟁과 관련된 주가가 일제히 치솟았다. 갑자기 ‘한국전쟁 특수’가 일어났다. 무기에 쓰일 고철 가격이 나날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 덕분에 미자네는 갑작스럽게 형편이 넉넉해졌다. 이후 상황은 무서운 속도로 변해갔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넝마주이를 자청하고 폐품을 수집했다.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까지 너도나도 이 일에 끼어들었다.
“폐품 수집하는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으니까 현관문은 꼭 닫아둬야 해. 안 그러면 신발까지 몽땅 가져간다더라.”
미자가 어머니의 폐품 손수레를 밀며 일손을 거들고 있을 때 들으라는 듯 수군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선언했다.
“이제 폐품 수집은 안 하련다.”
미자도 아버지도 놀랐다. 어머니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말했다.
“내가 모은 고철이 대포가 되고 탄환이 되어 지금 같은 민족의 우리 형제를 죽이고 있구나!”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당신도 참. 모처럼 벌이가 좋아졌을 때 바짝 벌어야지.”
아버지가 말했다.
“지난번에 당신이 그랬잖아. 번듯한 집을 한 채 사서 어서 이사 가고 싶다고. 미자 방을 따로 마련해줄 수 있는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고 그랬잖아.”
미자 어머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자에게 큰 키를 물려준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키가 컸다.
“우리가 모은 고철로 동포가 서로 죽고 죽이고 있다니까요.”
어머니가 호통을 쳤다. 미자는 그 전에도 그 후로도 어머니가 그 정도로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조선이라는 글자도 일본이라는 글자도 쓸 줄 모르는 무지렁이지만 당신은 다르잖아요. 네 나라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이렇게 불 보듯 빤한 이치를 모른 척할 셈이에요?”
--- p.301~302

“줄곧 생각했어.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얼마나 많이 생각했다고. 그때 만주의 그 절에서 욧짱이 주먹밥을 나눠줬잖아. 욧짱은 어떻게 나한테 제일 큰 덩어리를 줬어?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럴 수 있었어?”
이날 이때까지 기다려온 질문이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다마코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는 미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나도 우타를 키우고 나서 어렴풋이 짐작이 가기는 하더라고. 우타에게라면 뭐든지 줄 수 있으니까. 우타를 키우며 종종 생각하곤 해. 어머니가 내게 해주셨던 일. 그리고 욧짱이 내게 베풀어준 정.”
미자는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마리는 그 얼굴을 올려다보며 하던 말을 계속했다.
“아무리 불행의 나락에 떨어져도 베풀어줄 인정이 있다면, 또 자신이 받았던 배려를 기억하고 있다면, 그 따뜻한 마음에 의지해 살아갈 수 있어. 그리고 자신이 받았던 배려를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할 수 있어. 우타를 키우며 겨우 깨달았어. 욧짱은…… 아니, 누가 욧짱한테 그런 사랑을 베풀어줬던 거야?”
“어머니.”
미자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조선에 살던 시절, 어머니랑 둘이 친척 집에 얹혀살았어. 찢어지게 가난했지. 그런데도 밥을 먹을 때는 어머니는 늘 내 몫을 더 많이 담아주셨어. 어떤 음식이든 마찬가지셨지. 내게 더 맛있는 쪽을 먹이곤 하셨어.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미자는 겸연쩍게 웃으며 마리를 향해 말했다.
“나야말로 마리 덕에 이만큼 살 수 있었어. 마리짱이 가르쳐줬잖아. 가슴을 쫙 펴고 당당하게 똑바로 앞을 보라고 했다는 어머니 이야기. 나는 줄곧 마리짱처럼 가슴을 쫙 펴고 살려고 노력했어. 따돌림당해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 마리짱이 가슴을 쫙 펴고 씩씩하게 살고 있으리라 생각하면 신기하게 힘이 나더라.”
--- p.397~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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