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을 아는 것은 우주를 아는 것에 맞먹는 일이다' 어느 책에선가 그가 적은 이 글귀는, 어쩌면 스스로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일지도 모른다. 총탄이 빗발치는 6.25 피난길에서 태어났고, 명문대를 졸업한 후 커리어우먼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는 것, 인생의 정오인 서른아홉에 모든 것을 버리고 명상수련을 시작했고, 출가도 입산수도도 하지 않았기에 그만큼 더 힘겨운 수련과정을 거쳤다는 것, 세상의 수억 가지 감정을 뚫고 나오는 고난도 수련법인 '금촉'을 통해 깨달음을 완성했다는 것…… 이런 설명으로 저자소개를 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흔한 오해는 그를 '채널러'로 보는 시각이다. '채널링'이라는 것이 자기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타 영들의 가르침을 단순히 받기만 하는 것인데 비해, 그가 행하는 대화는 질문 응답의 주도권을 쥔 채 묻고 싶은 것을 묻는 '인터뷰'라고 할 수 있다. 한쪽에는 그를 극찬하며 '큰스승' 내지 '구루'로 떠받들려는 이도 있다. 하지만 그는 위엄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큰스승'의 가면을 쓰고 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적성에 맞지 않을 뿐더러 그가 맡아야 할 역할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는 명상학교의 학생들이 하늘을 알고 사랑하고, 자연을 알고 사랑하고, 사람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선인(仙人)의 길을 알려주는 좋은 선생님으로 남고자 한다. 선인 곧 인간다운 인간을 길러내는 것만이 맑고 밝고 따뜻한 우주시대를 여는 첩경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는 천생 작가이다. 호사가들의 거듭되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어떤 책에서도 그의 사진 한 장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타고난 성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작가는 오직 글을 통해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모든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우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