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 실은 하나도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응?”
하나를 올려다보자 웬일로 콧등에 주름을 잡고 있다.
“왜? 뭔데?”
“요새 그런 말이 자주 들려서…… 아뇨, 주인어른이나 도련님과 직접 상관있는 일은 아니지만, 어쩌면 주인어른께서 알고 계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지요.”
준은 빨래를 널어놓은 2층 창문을 반사적으로 올려다보았다. 미치오는 그 너머에서 오랜만에 빈둥빈둥 낮잠을 즐기고 있을 터였다. 오늘은 비번이다.
“무슨 일인데?”
하나는 들고 있던 배추를 내려놓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도련님은 모르시나요? 이 동네에 안 좋은 소문이 돈답니다.”
“안 좋은 소문?”
“네. 어느 집에서 살인이 벌어졌다…… 젊은 아가씨가 살해됐다는 소문이에요.”
--- p. 22-23
그날 밤.
침대에 누운 준은 멀리서 우편함이 달가닥하는 소리를 들귀가 밝다. 잠이 깊지 않다. 아버지에게서 유전된 특성이겠지만, 밤에 혼자 있는 환경이 된 뒤로 그런 경향에 더욱 박차가 가해졌다.
어쩔까, 귀찮은데 하는 사이에 잠기운이 가시고 말았다.
일어나 나와봤다. 계단을 내려와 부엌 시계를 보니 새벽1시가 넘었다.
현관 미닫이문을 살며시 열었다. 추위에 몸서리가 쳐졌다.
빨간 페인트를 칠한 우편함에서 하얀 무언가가 삐져나와 있었다. 손가락으로 모퉁이를 잡고 살짝 당겨보니 봉투였다.
욕실로 가서 그곳에 놓아두는 비닐장갑을 끼고 돌아왔다. 만일을 위해서다. 신고가 봤다면 ‘역시 형사 아들은 다르다니까’라고 했을지 모른다.
‘야기사와 미치오 귀하’ 라고 펠트펜 같은 것으로 받는 사람 이름을 썼다. 묘하게 네모반듯한 글씨다.
주소는 쓰여 있지 않았다. 우표도, 소인도 없다. 누가 직접 갖다놓은 것이다.
봉투를 뒤집어보니 뒤에도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발신인 불명.
잠시 망설이다가 뜯어보기로 했다. 장갑을 낀 채 뜯느라 애먹었다.
편지지가 달랑 한 장 들어 있었다. 역시 펠트펜으로 쓴 것 같은 글씨로 달랑 한 줄 쓰여 있었다.
“시노다 도고 는 살인자”
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물어봐도 밤은 대답해줄 성싶지 않았다.
--- p. 55-57
인간은 죽으면 부패하고 냄새도 나. 아름답던, 사랑스럽던 얼굴도 어디론가 가버려. 살인이 큰 죄인 건, 그 누구에게도 다른 사람을 그런 모습으로 바꿔놓을 권리가 없기 때문이야. 그리고 보통 상상력을 가진 인간이라면 사람이 죽으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 마음으로 이해해. 그러니까 엔간한 일 아니면 남을 죽이지 못해.
그런데 요새 그런 상상력이 없는 인간이 늘고 있어. 무시무시하게 늘어났어. 그것도 확실히 소년들 중에 많이. 그렇지만 그들도 눈이 있고, 코가 있고, 감수성이 있거든. 실제로 사람을 죽이면, 그제야 그게 어떤 일인지 몸으로 이해해.
그럼 그들은 어떻게 될까. 상상력이 없기에 살인이 ‘가능했던’ 그들이 눈앞에 시체가 놓였을 때 어떻게 생각할까. 추하다, 더럽다,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 버리든지, 파묻든지, 감추든지 하겠지. 그로부터 떨어지려고 하겠지. 바로 떨어지고 싶은 마음에 길바닥에 아무렇지도 않게 내버리고 하니까 더더욱 냉혹해 보여. 하지만 결단코, 결단코 그걸 도로 파내서 여기저기 버리는 짓은 안 해. 아니, 할 수 없다고 난 봐. 시체 갖고 장난을 치는 건 오히려 그런 타입보다 상상력이 과하게 존재해서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치닫는 인간이라고. 그리고 그런 정신이상자는 결코 동지를 안 만들어. 무리를 조직해서 행동하는 일은 없어.
--- p. 279-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