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모여 세월이 되고, 작은 일들이 이어지고 쌓이면서 삶이 되고 인생이 된다. 소천하신 김수환 추기경님 농담처럼, 삶이란 삶은 달걀이지, 삶이라는 글자를 풀면 사람이 되지, 사람이란 살아가는 존재이지, 사람들이 사는 건 다 삶이지. 이런 가소롭고 시답잖은 글을 쓰는 나는, 가소롭고 시답잖은 시도에 대해 고백함으로써, 혹시 나처럼 가소롭고 시답잖게 살았다고 아파할 분들과 공감하고 싶다. 창밖 눈바람 속 앙상한 푸나무들이 열매 없이 살았어도 무의미하게 살았던 게 아니라고 우기면서. --- p.19
외로운 사람에겐 자기 방이 필수이고, 또 여러 개의 침대도 필수일 것 같다. 잠들지 못할 때 뭔가를 읽고 끄적거리기에 편한 침대와, 엎드려 멍청해질 수 있는 침대와, 꿈꾸거나 상상하기에 좋은 침대와, 기다릴 수 있는 침대와, 만나서 더불어 놀 수 있는 침대와, 헤어져 홀가분하고 편안해지는 침대 등등, 외로운 사람에겐 침대가 많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더 외로운 사람에겐 많은 침대보다도 많은 베개가 더 필요할 것 같다. 엎드려 턱 받칠 수 있는 베개, 베개 밑으로 머리통을 들이밀어 파묻힐 수 있는 크고 묵직한 베개, 뒤통수를 편하게 올려놓을 수 있는 베개, 얼굴에 올려놓아 두 눈에 무게감을 느끼게 해주는 베개, 가슴에 껴안고 뒹굴 수 있는 베개, 돌아누우면 등을 받쳐주는 베개, 두 무릎 사이에 끼울 수 있는 베개, 엉덩이를 받쳐 무지근한 통증을 달래주는 베개, 두 다리를 올려놓을 수 있는 베개, 발이나 발바닥으로 꼼지락거리며 간질이는 오돌토돌한 촉감의 베개, 그래도 잠이 안 올 때 벌떡 일어나 앉아, 두세 번쯤은 집어던질 수 있는 베개, 더 나아가서는 발길로 몇 번이고 걷어찰 때 화풀이가 될 정도로 무게가 나가는 베개는 물론이거니와, 누워도 엎드려도 모로 누워도 돌아누워도 거꾸로 누워도 반만 누워도 일어나 앉아 무릎에 올려놓는 베개…… 등등. 밥숟가락보다도 훨씬 필수적인 생필품으로서 베개는, 밤이 긴 가을부터 더 외로운 사람에게 특히나 많아야 한다. --- p.45
한턱 쏠게, 점심 데이트 해야지, 전화할게 등등 오늘도 빈말이 되고 말 참말을, 거짓말이 되고 말 참말을 남발해놓았다. 성공, 성공 하지 말자. 위대한 실패는 성공보다 빛난다. 열정, 열정 하지 말자. 우리 시대에 필요한 건 메달을 향한 열정보다도 메달을 포기할 줄도 알고, 어떤 때 어떤 일에 그래야 하는지를 가릴 줄 아는 분별력과 자유로운 정신과 진정한 용기가 아닐까? 진정한 용기일수록 어리석다. 세상에 바보가 될 줄 아는 용기야말로 참된 열정이라고, 위대한 실패가 성공보다 더 빛난다고. --- p.54
칸트는 미적 대상의 분류 기준에 미美와 추醜외에 숭고함을 추가하면서, 숭고함이란 기나긴 고난을 거쳐서야 풍겨날 수 있어, 언어로 정의할 수 없다고 했다. 겨울철은 이른바 역경과 고난의 시기여서 당할 때는 고통스럽지만, 통합적으로는 인생에 유익한 유예와 여유 기간이 된다고들 한다. 삶이 숭고하다는 것은, 잊을 만하면 다시 겨울 같은 고난과 역경이 끼어드는 덕분이지. 몇 가지 불행 없는 이는 아무도 없다. 위의 시도 그 비슷한 느낌에서 쓰였던 듯하다. 그러나 다 용서해주시기보다는, 조금은 남겨두시어 늘 용서 구할 거리가 되었으면. 나 스스로를 다 용서해버리거나, 저절로 잊어버리지 않도록. --- p.65
사랑은 짐스럽기 때문일까? 나 혼자서 사랑하고 나 혼자서 울고불고 그러다 제 풀에 지치는 식이 내 식이었을까? 지금도 나는 압도적인 사람, 강한 사람이 싫고, 밀어붙이는 무대포가 싫고, 내 뜻과는 다르게 밀리고 끌려다니고 시달리는 건 싫다.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내 식을 배려하지 않는 그 무엇도 나는 싫다. 사랑은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 전부여야 한다.
--- p.71